에코칼럼

"나는 노비" vs "당신은 노비가 아니오"…조선시대 이색소송 재밌네!

세미예 2010. 3. 2. 09:44

일흔이 넘은 여성인 피고는 자신이 양인이 아닌 성균관 노비라고 합니다, 반면에 원고는 그녀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맞을텐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1586년(선조 19년) 음력 3월 13일 어느 따스한 봄날. 전라도 나주고을 관아의 뜰에서 벌어진 '노비 소송'의 한 장면입니다.
 




인기 드라마 '추노'를 계기로 한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추노'를 통해 조선시대를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그 사회의 법은 어땠으며 어떤 사회였는지 다시한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노비제도와 조선시대의 법과 사회를 돌아봤습니다.


서평-나는 노비로소이다-책-이색 책'나는 노비로소이다' 책.


조선시대 소송을 보니

피고는 노비라고 말하고 원고는 그녀가 양인이라고 다투는 이상한 장면은 이지도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원고)과 다물사리라 불리는 70대 노파(피고) 사이의 분쟁입니다. 양측 주장은 팽팽합니다.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주장하고, 다물사리는 자신을 노비라고 반박합니다.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분쟁에서 피고는 본인이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는 참으로 특이합니다.

'법정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나주 관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소송입니다. 경북 안동의 의성 김 씨 종가에 전해내려오는 유물 중에서 고문서 6점이 발견됐습니다. 의성 김 씨는 학봉 김성일의 후손.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왜란 가능성을 보고한 황윤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역사의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이 김성일입니다.


그러나 학봉은 일단 전쟁이 터지자 누구보다 처절히 왜구에 맞서 싸웠으며, 그 전에 공정한 송관(법관)으로도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의성 김 씨 종택에서 발견된 고문서 6건 가운데 다섯 건이 모두 학봉이 나주 목사로 재직했던 시기 그가 처리한 판결문과 소송문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몇가지 사건을 모티브로 조선시대 사법제도의 얼개를 흥미롭게 역추적하고 있습니다.


왜 노비라고 주장했을까?
노비소송이 벌어진 1586년 전라도 나주 관아. 일흔 넘은 여성인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양인이 아닌 성균관 노비라고 했고 원고인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며 다툽니다.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당시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쓴 판결문은 소송의 전모를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민사사건 진행 오늘날과 흡사

조선시대 민사사건의 진행과정은 오늘날과 매우 흡사합니다. 원고(이지도)와 피고(다물사리)는 법에 따라 판결해 달라는 '시송다짐'을 한 후 최초 진술인 '삶등'을 합니다.


양반인 이지도는 법정에서 "다물사리는 양인이지만 그 남편이 내 아버지 소유의 사노비이므로 그 자손들도 우리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물사리가 거품을 뭅니다. 자신은 관노비의 딸이며, 본인은 물론 후손들도 관노비이지 사노비가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송관 김성일은 양측의 주장만으로는 시비를 가릴 수 없어 증거조사에 들어갑니다. 한달을 끌어 마무리된 이 소송에서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자녀를 위한 희생 오롯이
다물사리가 자신이 노비라고 주장한 것은 딸과 그 자녀들의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사노비보다 처지가 나은 공노비로 만들려 한 것입니다.


다물사리가 이지도 집안의 종인 윤필과 혼인해 낳은 딸은 신분이 노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버이 가운데 1명이라도 천인이면 그 자손은 노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 모두 노비라면 자식은 어머니 쪽 상전의 노비가 됩니다. 따라서 다물사리가 성균관의 노비라면 딸과 손자들도 성균관에 딸린 노비가 되지만, 양인이라면 윤필의 상전인 이지도 집안에 매이게 됩니다.


나주목사의 현명함
나주목사는 증거를 조사하고 당사자와 증인의 진술을 듣고서 다물사리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다물사리의 딸과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 집안에 지급하라고 결정했습니다.




법대교수가 펴낸 노비제의 실상
임상혁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나는 노비로소이다'(너머북스 펴냄)에서 이지도와 다물사리의 노비소송을 큰 줄기로 삼아 조선의 사법제도를 분석하면서 노비제의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법규를 엄밀히 따르지 않고 적당히 요령껏 판결하는 태도를 '원님재판 하듯'한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이지도와 다물사리의 소송을 예로 들며 조선시대의 소송제도가 잘 정비돼 합리적으로 운영됐다고 감탄합니다.





조선시대 소송제도 잘 정비
현직 법대 교수인 저자는 해박한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소송의 운영과정을 오늘날 재판과정과 구체적으로 비교하고 조선 사법제도의 선진성도 언급합니다. 당시에도 공정한 판결이 기대되지 않을 경우 송관에 대한 기피신청이 가능했고 심급제도를 통해 세 번까지 제소를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심도득신법'에 따라 세 번의 재판에서 패소했더라도 그 과정에 하자가 있을 경우 다시 재판을 할 수 있게 한 점 등입니다.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될 때 소송을 다른 곳에서 할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심급제도를 통해 3차례까지 제소할 수 있도록 한 점, 재판에서 3차례 패소했더라도 그 과정에 하자가 있으면 다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한 점 등을 사례로 꼽아 전통 소송제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조선에서 특히 15, 16세기의 민사소송은 노비에 관한 것이 주를 이뤘다면서 이 때문에 노비에 관한 법제가 상세히 발달돼 있고, 소유권과 상속에 대한 규정도 노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고 합니다. 그는 노비는 사람이면서도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으로 물건 성격도 지니는 이중적인 면이 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저자는 노비제가 조선시대의 신분제, 나아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관건이라면서 노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264쪽. 1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