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칼럼

6월 항쟁이 뭐죠? 6월항쟁과 민주주의가 뭐길래?…아직도 현재 진행형 6월항쟁

세미예 2010. 6. 10. 08:25

"6월10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글쎄요? 무슨 날이죠?"
"그딴것 별로 관심이 없어요."
"우리 청년세대들에겐 취업이 우선입니다."
"청년들도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엔 취업이 너무나도 시급합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젊은층이 많습니다. 6월항쟁이 어느덧 조금씩 잊혀져가는 과거의 일이 되어 갑니다.


"6월 민주항쟁 아세요" 6월 항쟁이 어느덧 23주년을 맞았습니다. 6월항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6월 항쟁을 직접 겪지않은 세대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이 점점 스러져 갑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 당시의 절규가 남아있다면 다시한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6월 항쟁은 결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선봉에서 목청껏 민주화를 외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님. 아마 오늘도 그날을 생각하며 하늘에서 이땅을 내려다 보고 계시겠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1주기가 지난 오늘 다시 맞은 6월항쟁을 돌아봤습니다.


민주공원-독방-6월민주항쟁-민주주의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6월민주항쟁
역사를 되돌려 23년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1987년 6월29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지난한 6월항쟁이 마침내 조그만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6월 민주항쟁은 당시 부산 서면과 남포동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이끈 민주주의를 향한 절류였습니다. 당시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절규했던 ’6월의 주역'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당시 ‘부산항쟁'을 주도한 단체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였습니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중의 한사람은 노무현 당시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6월 민주항쟁
노 전대통령님이 맹활약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는 시위 행렬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부산 범천동 범내골로터리 4층 건물 맨 위층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간판도 없는 열평 남짓한 이 사무실은 당시 건물을 뒤덮는 현수막을 내걸고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 건물은 두 건물 사이를 증축한 독특한 구조 때문에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사무실 옥상을 통해서 다른 건물 입구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무실을 빼라는 기관들의 압력에도 건물주인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있는 뜻깊은 곳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를 합격합니다.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임용뒤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합니다. 1981년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약합니다. 이후 86년부터는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6월 항쟁의 주역이 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재야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다 6월항쟁을 통해 일약 민주화투쟁의 핵심인물로 부상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노 전대통령은 이후 88년 4.26총선에서 5공화국의 대표적 인사를 물리치고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 청문회 등을 통해 대중정치인으로 데뷔합니다.


6월 민주항쟁이 뭐기에?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국민들이 들불처럼 일어섰던 6월 민주항쟁이 올해로 벌써 23주년을 맞았습니다. 당시 태어났던 아이들이 우리 나이로 벌써 24살이 되었으니 6월민주항쟁이 세간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혀질 법도 합니다.


하지만, 6.10항쟁은 아이들부터 60대 어르신들까지, 직장인에서 대학생 부두노동자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직업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 십만명의 시민들이 1987년 6월10일 이후 6월29일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때까지 목이 터져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해방이후 최대의 민주항쟁이었습니다.


 6월 민주항쟁 발단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해 1월 14일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던 부산출신의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대규모 집회로 이어졌습니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가 주최한 2월 7일 추도식 집회와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은 당국이 경찰력으로 막았으나 오히려 부근에 있었던 시민들의 호응을  받을 정도였고 거리에서 경찰에 대한 비난이나 항의 등의 형태로 시민들이 점차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군사정권에 항거한 시민들의 민주화 절규
정세를 오판한 군사정권은 4월 13일 개헌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헌법으로 대통령선거를 하겠다는 ‘4 · 13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그러자 대한변협 기독교계 민통련 등이 호헌반대선언을 하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신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각 대학교수, 문학인, 전 · 현직 의원, 변호사, 교사, 대학원생,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영화인, 연극인, 미술인 대중연예인 등 각계에서 4 · 13호헌조치 반대 성명서가 나오고 기자들은 자유언론쟁취운동을 벌였습니다.


'4·13 호헌선언’은 마른 장작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고, 이한열열사의 최루탄 피격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본 6월항쟁 
1987년 1월14일 박종철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합니다. 3월3일엔 ‘고 박종철열사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고 박종철열사 49제’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 을 진행합니다.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을 발표합니다. 5월18일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을 폭로합니다. 5월27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하고 4·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합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열사가 교내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피격당합니다. 6월10일 국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개최, 6월 민주 대항쟁 시작, 명동성당 농성 투쟁 시작합니다.


6월15일 전국 45개 대학생 68,000여명 격렬한 시위를 하게 됩니다. 6월18일 국본,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결의대회’가 개최되고 전국적으로 150만명이 참가합니다.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전국 33개 지역에서 18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6월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시국 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합니다.


부산의 6월 항쟁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독재정권이 자행한 민주화세력에 대한 살인행위로 규정한 부산시민들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산 재야인사들은 박종철열사의 추도집회를 준비하며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신호탄을 올립니다.


2월7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개최된 추도회를 계기로 군사정권은 재야인사에 대한 사전 가택연금, 연행, 구속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3월3일 부산의 대각사 앞에서 ‘박종철열사 추모 3.3 부산대행진’이 열렸고 사하구의 사리암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 박종철열사 49재가 열립니다.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호헌’의 부당함과 시국수습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이 연이어 발표됩니다.


5월17일엔 노동자인 황보영국열사가 옛 부산상고 앞 복개도로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광주학살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합니다. 


5월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 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돼 부산지역 6월항쟁을 이끌 지도부가 꾸려집니다.


6월10일 대각사 앞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고 박종철열사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부산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게 됐고 여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6월 항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6월16일 심야시위 도중 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대청동 가톨릭센터로 피신하면서 가톨릭센터 농성을 전개하게 됩니다.


6월18일, 좌천동 입체교차로에서 시위하던 이태춘열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은 30여 만명의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웁니다.


오늘날 6월 항쟁의 의미는
6월 항쟁은 국민들의 항쟁으로 급기야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냈고, 문민정부가 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으며, 이후 민주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6월 항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참다운 민주사회, 강제와 억압이 없고 억울한 희생자가 없는 사회가 오늘날 이땅에 이뤄졌을까요.





아직도 진행형인 민주화를 향한 절규
6월 항쟁은 올해로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과연 ‘참다운 민주사회’일까요. 오늘날 아직도 해야할 과제가 많은 6월 항쟁은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6월 항쟁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당시의 절규를 모르고 자란다는 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또 그들에게 6월 항쟁의 정신을 오늘날 구현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도 있습니다.

비록 6월 항쟁은 벌써 23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은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후세대들에게 그 정신을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