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칼럼

우리가 내팽개친 '거리의 사람' 오늘은 안녕하실까?

세미예 2008. 10. 3. 23:43

조선시대 걸인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풍유를 즐긴 김삿갓은 동가숙서가숙하며 풍찬노숙을 즐겼습니다. 고유가로 인해 최근 도심으로 나갈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방랑객 김삿갓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 ‘거리의 사람’('걸인'이란 용어 대신 사용함)을 만났습니다. 





이 ‘거리의 사람’은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 계단엔 손을 벌린채 무릎을 구부린채 돈통을 앞에 놓고 엎드려 있습니다. 무슨 죄를 짓기라도 한 것일까요. 마치 초등학교 시절 벌을 받는듯한 자세입니다. 보기에도 안쓰럽고 측은해 보입니다.



동전 몇닢 떨궈주는 돈으로 하루 연명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돈통에 동전 몇 개를 떨구어 봅니다. 또 본일을 보고 다시 지하철을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에 또 마주칩니다. 몇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자세 그대로입니다. 측은해서 이번에는 천원짜리 지폐를 몇장 두고옵니다. 몇일이 지나 또 지하철을 타러 갔습니다. 또 ‘거리의 사람’은 그 자리에 몇 일전의 그 옷을 입은채 그 자세 그대로 있습니다. 또 동전을 떨구고 지나갑니다. 돌아올때에도 저번처럼 지하철계단 돈통에 돈을 떨구고 지나옵니다.


또 몇일이 지나 지하철을 타러 갑니다. 그 ‘거리의 사람’은 또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있습니다. 동전을 꺼내기가 이번엔 조금씩 부담스러워집니다. 시험이 들기 시작합니다. '매번 이렇게 돈을 줘야하나.' 시험은 잠시 갑자기 그분이 고마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살아있음이, 다시만나게 되었음을 감사해 봅니다.


 


동전을 던져주면서 돈통을 살펴봅니다. 천원짜리 지폐는 거의 없습니다. 동전 몇닢이 거의 전부 입니다. ‘저 돈으로 하루를 연명해온 것일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돕니다. 저 분은 저렇게 적은 돈으로도 살아가는데 난 흥청망청한 일은 없는가. 일순간 부끄러워집니다. 


자녀와 맞닥뜨렸을때 뭐라 설명하나

하루는 어린 아이와 그 곳을 지나오다가 아이가 보는 것같아 지폐를 줬습니다. 아이는 영문을 몰라 물어봅니다. "저금통이야? 이상하게 생겼네. 그런데 왜 땅에 저금통이 있어.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하고 있어요" 뭐라 설명해야 좋을 지 몰라 "저금통에 돈을 모아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돕는 좋은 분이야"라고 적당히 둘러댔습니다. 


돕고 안돕고는 스스로의 양심이 판단할 일

얼마전 다음 아고라에 이 분들을 '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토론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토론에서 누리꾼들은 선뜻 어떻게 해야할 지 망설이고 있음을 봤습니다.


제 생각은 스스로의 양심에 맡기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양심이 내키면 선뜻 도우면 되고 양심이 내키지 않으면 돕지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기초해서 행동하면 그게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가의 복지시책 문제없나

하지만, 언제까지 저 ‘거리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돼야 하는 것일까. 안타깝습니다. ‘거리의 사람’ 모두를 이런식으로 도울수는 없고 세계경제가 어렵다보니 최근엔 이 분들이 늘어나는 것같아 답답합니다. 국가의 복지혜택을 없는 것일까.


날씨는 조금씩 추워지는데 겨울철엔 그 추위를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 저들도 귀중한 생명력을 지닌 우리 이웃인데 이렇게 내팽개쳐서 되는 것일까. 참으로 이 사회는 불공정합니다. 가진자들은 흥청망청 돈을 주체하지 못해 향락산업에 취할대로 취해버린 상태이고, ‘거리의 사람’은 단돈 몇푼이 없어서 한끼를 굶어야하니 말입니다. 흥청망청 쓰대는 향락산업의 흥청거림을 거둬서 저분들을 위한 복지시책으로 활용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