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올해로 입사 2년 차가 된 회사원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했으니, 회사에서는 아직도 막내 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습니다. 회의 전에 발표 자료를 세 번씩 다시 열어보고, 선배에게 메신저 하나를 보내놓고도 말투가 너무 가벼웠나 혼자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옆 부서에 있었습니다.
재무기획팀 윤 대리님. 저보다 네 살 많고, 입사 5년 차였습니다.
처음에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할 때는 얇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퇴근할 때는 안경을 벗어 셔츠 주머니에 넣는 사람이었습니다. 셔츠 소매는 늘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반듯하게 접어 올렸고, 손목에는 오래 차서 가장자리가 조금 닳은 검은 시계가 있었습니다.
키는 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거울 속에서 제 눈높이가 그보다 분명히 위에 있는 걸 보고 저 혼자 조금 당황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윤 대리님은 그런 차이를 의식해 움츠러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없이 서류를 받아 들고, 제가 먼저 내릴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모습이 이상하게 더 든든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가까이서 볼수록 잘생긴 얼굴보다 다른 것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다른 직원들이 탕비실로 몰려가 커피를 마실 때도, 그는 제일 먼저 자리로 돌아가 숫자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후배가 실수해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지적하지 않았고, 조용히 메신저로 수정할 부분만 보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남자 직원들이 “윤 대리, 오늘 한잔하지?” 하고 불러도 그는 늘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웃었습니다.
“오늘은 좀 어렵습니다. 다음에요.”
처음에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생겼는데 참 바르게만 사는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그렇게 퇴근 시간만 되면 급하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자꾸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처음 제대로 보게 된 날
제가 윤 대리님을 처음 남자로 의식한 건 봄 분기 보고 날이었습니다.
회의 시작 열 분 전, 제가 취합한 자료의 합계가 맞지 않았습니다. 부장님이 화면을 보다가 “이 숫자 왜 다르지?”라고 묻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가 만든 자료였습니다.
손이 떨려 마우스를 제대로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파일을 다시 열어봤지만 어느 셀이 틀렸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회의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누군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옆 부서 참석자로 앉아 있던 윤 대리님이 조용히 제 쪽으로 몸을 기울였습니다.
“필터 걸린 상태에서 합산된 것 같아요.”
그는 제 마우스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 옆에 선 채 화면 오른쪽 위를 손끝으로만 가리켰습니다.
“여기만 풀고 다시 계산해보세요. 괜찮아요. 아직 회의 시작 안 했습니다.”
그가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 셔츠 소매에서 은은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려고 화면만 봤습니다.
정말 금방 해결됐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저는 노트북을 급히 들고 복도로 나가는 그를 따라갔습니다.
“대리님.”
그가 돌아봤습니다.
“아까 정말 감사했어요. 저 때문에 회의 망할 뻔했는데…”
그는 들고 있던 파일을 옆구리에 끼우며 웃었습니다.
“안 망했잖아요.”
“그래도 저는 진짜 머리가 하얘졌어요.”
“그럴 때 있습니다. 저도 입사 2년 차 때는 임원 보고 자료 숫자 하나 틀려서 밤새 다시 출력했어요.”
저는 믿기지 않아 물었습니다.
“대리님도 그런 실수를 해요?”
그가 피식 웃었습니다.
“저를 너무 대단하게 보셨나 봐요.”
그 말에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윤 대리님은 냉정해서 말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당황할 때 더 조용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에게만 남아 있는 작은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그 뒤로 저는 회의실에 들어가면 제 팀 사람들보다 먼저 윤 대리님이 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저를 특별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업무 질문을 하면 누구에게나 정확하게 답했고, 후배가 실수해도 큰 소리로 몰아세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괜히 의미를 붙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들이 자꾸 반복됐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 속이 좋지 않아 식사를 거르고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두 시쯤,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습니다.
윤 대리님이었습니다.
“점심 안 드셨죠?”
저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했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 뒤 답장이 왔습니다.
“오늘은 탕비실에서 커피도 안 가져가셨잖아요. 평소에는 오전에 꼭 한 잔 드시던데.”
저는 그 문장을 세 번쯤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가 오전마다 커피를 한 잔 마신다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별것 아닌데도 이상하게 마음을 간질였습니다.
그날 퇴근 무렵, 저는 그에게 짧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덕분에 이제 괜찮아요. 내일은 커피 꼭 마실게요.”
그는 곧바로 답했습니다.
“내일 확인하겠습니다.”
그 짧은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서, 저는 퇴근길 내내 괜히 웃음이 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 탕비실에서 종이컵에 커피를 받고 있는데 문이 열렸습니다.
윤 대리님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컵을 한번 보더니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오늘은 드시네요.”
저는 그 순간 정말 바보처럼 대답했습니다.
“확인하신다면서요.”
말을 하고 나서 얼굴이 화끈해졌습니다.
그도 잠깐 멈칫했습니다. 그러다 제 눈을 한 번 보고는, 커피 머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요. 확인했습니다.”
탕비실에는 커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오전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 사람을 조금씩 기다리게 됐습니다.
프린터실에서 너무 가까워진 순간
며칠 뒤에는 야근을 하다가 프린터 앞에서 보고서를 바닥에 쏟았습니다.
마감 시간은 가까웠고, 인쇄한 자료는 순서대로 다시 맞춰야 했습니다. 피곤함과 짜증이 함께 올라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때 이미 퇴근하던 윤 대리님이 복도 끝에서 다시 걸어왔습니다.
“그거 페이지 순서 맞춰야 하죠?”
“아니에요. 대리님 가셔야죠.”
“엘리베이터 하나 놓치면 됩니다.”
그는 가방을 프린터 옆에 내려놓고 제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좁은 프린터실 바닥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흩어진 종이를 주웠습니다. 제가 급하게 손을 뻗다가 같은 페이지를 집으려던 그의 손등을 스쳤습니다.
둘 다 동시에 손을 멈췄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손을 뺐습니다.
그는 잠깐 제 손끝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종이를 다시 집었습니다.
“제가 더 급했네요.”
그 말은 평범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습니다.
자료를 다 맞춘 뒤 제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자꾸 대리님 퇴근을 늦추네요.”
그가 가방을 들며 말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문을 나서려다, 한 번 뒤돌아봤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혼자 너무 급하게 하지 마요. 손 베일 뻔했어요.”
그 사람이 제 손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보고서 종이를 주워준 일이 뭐라고, 손등이 스쳤던 순간과 그가 뒤돌아보며 했던 말이 밤늦게까지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퇴근 후에도 늘 어딘가로 달려갔습니다
마음이 생기고 나니, 그가 왜 늘 퇴근을 서두르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다른 남자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잡았습니다. 회식이 없는 날에도 누군가는 스크린골프를 치러 갔고, 누군가는 야구를 보러 갔습니다.
윤 대리님만 늘 사라졌습니다.
정시에 퇴근하는 날도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를 끄자마자 파일을 가방에 넣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서둘렀습니다.
한 번은 두 부서 회식이 함께 잡힌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괜히 아침부터 머리를 오래 만졌습니다. 평소에는 잘 바르지도 않던 립스틱을 점심 뒤에 한 번 더 고쳤고, 저녁에는 그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까 혼자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회식 시작 직전, 윤 대리님이 부장님 자리로 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업이라는 말에 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짧게 인사한 뒤 바로 식당을 나갔습니다. 저는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앉은 선배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습니다.
“윤 대리 야간 대학원 다니는 거 몰랐어?”
“대학원이요?”
“응. 회사 끝나면 바로 수업 가더라. 주말에는 일도 하나 더 한다던데. 저렇게 살면 연애할 틈도 없겠다.”
“주말에도 일을 해요?”
“본인이 말을 안 해서 정확히는 모르지. 그냥 엄청 바쁘게 사는 것만 알아.”
그날 고기는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애할 틈도 없겠다.’
그 말이 제 마음 한쪽에 조용히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가 더 좋아졌습니다.
멋있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퇴근 후 가볍게 웃고 떠들 시간에, 그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피곤한 내색 한 번 없이 자기 일을 해냈고, 저 같은 후배의 실수까지 조용히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알면 알수록, 더 쉽게 마음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둘만 남은 야근,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던 밤
초여름, 저희 팀과 윤 대리님 팀이 함께 신규 프로젝트 자료를 정리하게 됐습니다.
마감 전날에는 모두 늦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밤 아홉 시가 넘자 팀장님들이 먼저 돌아갔고, 열 시쯤에는 큰 사무실에 저와 윤 대리님 둘만 남았습니다.
형광등은 절반만 켜져 있었고, 에어컨이 꺼진 사무실은 조용했습니다. 창밖으로 맞은편 빌딩 불빛만 몇 개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화면을 보다 눈이 아파 잠깐 눈두덩을 눌렀습니다. 그때 제 책상 옆에 비닐봉지가 내려앉는 소리가 났습니다.
편의점 샌드위치와 따뜻한 우유였습니다.

“저녁 안 드셨죠?”
고개를 들자 그가 제 책상 옆에 서 있었습니다.
“대리님도 안 드셨잖아요.”
“저는 오는 길에 김밥 먹었습니다.”
“거짓말.”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저도 당황해 입을 다물었는데, 그는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웃었습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니셨잖아요. 저녁 먹을 시간 없었을 것 같아서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제 옆 빈 의자에 앉았습니다.
평소에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제 의자와 그의 의자 사이가 한 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셔츠 소매가 제 팔 가까이에 닿을 듯 말 듯했고, 저는 샌드위치 포장지를 뜯는 일조차 어색해졌습니다.
“안 드세요?”
“대리님이 보고 계시니까 더 못 먹겠어요.”
그가 놀란 듯 저를 봤습니다.
저는 제 말이 너무 솔직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럼 안 볼게요.”
그는 몸을 돌려 모니터를 보는 척했습니다. 그런데 입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샌드위치를 한입 먹다가 괜히 물었습니다.
“대리님은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요?”
그의 미소가 아주 조금 사라졌습니다.
“안 바쁘게 살면 큰일 나서요.”
“큰일이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그 말이 서운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사람에게 조금 가까운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제게 보여주지 않는 시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먼저 마음을 꺼낸 밤
업무를 마치고 컴퓨터를 끈 뒤에도 저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도 가방을 챙기다가 잠시 멈췄습니다.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상하게 길었습니다.
제가 먼저 용기를 냈습니다.
“대리님.”
“네.”
“저는 대리님이랑 이야기하는 시간 좋아요.”
그는 가방 지퍼를 닫던 손을 멈췄습니다.
저도 제가 어디까지 말하려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미 시작한 마음은 멈추기가 어려웠습니다.
“회의할 때도,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도, 이렇게 둘이 남아 있을 때도요. 이상하게 대리님이 있으면… 제가 자꾸 기다리게 돼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아주 잠깐 제게 다가올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제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습니다.
“그런 말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습니다.
“저한테 너무 쉽게 하지 마요.”
“쉽게 한 말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더 이상 웃지 못했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끝내 하지 못하고, 제 책상 위에 놓인 빈 우유병만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날은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싫어서 멀어지려던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다가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는 사람의 얼굴인지.
그날 이후, 그가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윤 대리님은 달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탕비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 “오늘은 커피 드셨네요” 같은 말을 했을 사람이, 이제는 제 옆을 지나가며 고개만 숙였습니다.
월요일 아침, 저는 일부러 평소처럼 커피를 타러 갔습니다. 혹시 그가 들어오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고 했습니다.
정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순간 제 심장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가 서 있는 걸 보고도 잠깐 멈췄다가, 커피 대신 정수기에서 물만 받아 바로 나갔습니다.
저는 손에 든 종이컵이 식을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메신저도 짧아졌습니다.
전에는 제가 자료를 보내면 “확인했습니다. 늦게까지 고생 많으셨어요”라는 말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답이 한 줄뿐이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괜한 말을 해서 부담을 줬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근하던 밤, 제가 너무 솔직해져서 그가 당황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더 확실해졌습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저는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웃었는데, 그는 저를 본 순간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하더니 다른 직원 옆으로 한 걸음 옮겼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공간에 서 있으면서도, 예전보다 훨씬 멀어진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오후, 화장실 칸 안에서 저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가운데가 눌린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걸까.
제가 좋아한다는 티를 낸 순간, 그 사람이 피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워진 걸까.
좋아하는 남자 동료가 나를 피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자존심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보다, 혹시 내가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부터 걱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피한 이유가 제 마음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는 것을요.
야간 대학원 강의동 앞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저를 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업무 공용 캘린더에서 윤 대리님의 외부 교육 일정에 적힌 학교 이름을 보았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무심코 말했던 야간 대학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후 내내 그 학교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지웠다 했습니다.
회사에서 붙잡고 따져 묻는 것은 싫었습니다. 복도에서 사람들이 지나가고, 탕비실 문이 수시로 열리는 곳에서 제 마음이 왜 이렇게 초라해졌는지 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저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습니다.
“대리님,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만날 수 있어요? 회사 말고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읽음 표시가 뜬 뒤에도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냥 집에 갈까 싶어 계단을 몇 칸 내려가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9시 20분쯤 끝납니다. 많이 늦는데 괜찮겠어요?”
저는 거의 바로 답했습니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캠퍼스는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 강의동 창문 몇 곳에만 불이 남아 있었고, 계단 아래 자판기 옆에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형광등 소리가 작게 울렸습니다.
저는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손에 쥐었습니다. 커피가 뜨거워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자꾸 옮겨 쥐었지만, 사실은 기다리는 제가 더 어색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캔커피를 들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강의가 끝났는지 학생들이 하나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윤 대리님은 거의 마지막에 나왔습니다.
회사에서 늘 반듯한 셔츠 차림으로 보던 사람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어깨에는 모서리가 닳은 검은 백팩을 메고 있었고, 한 손에는 형광펜 자국이 빼곡한 프린트 묶음을 들고 있었습니다. 안경 너머 눈은 피곤해 보였고, 셔츠 소매는 낮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저를 본 순간, 그는 계단 중간에서 그대로 멈췄습니다.
“서연 씨…”
저는 캔커피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대리님이 자꾸 도망가니까요. 오늘은 제가 찾아왔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끝부분에서 조금 떨렸습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커피와 제 얼굴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저 기다린 거예요?”
“네. 기다렸어요.”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괜히 웃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받으세요. 뜨거워서 손 아파요.”
그제야 그가 캔커피를 받아 들었습니다. 커피를 건네는 순간 손끝이 잠깐 닿았는데, 그는 급히 손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저는 그가 저를 완전히 밀어내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밤 캠퍼스를 걸으며 그가 피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강의동 뒤편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회사에서 그와 나란히 걸을 때는 늘 주변을 먼저 살폈습니다. 누가 볼까, 누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캠퍼스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몰랐습니다.
도서관에서 나온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멀리서는 농구공 튀는 소리가 났습니다. 윤 대리님은 캔커피를 따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만 감싸 쥐고 걷고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제가 뭘…”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습니다.
“야근하던 날 이후로 저 피하셨잖아요. 탕비실에서도,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메신저에서도요.”
그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보니, 그의 얼굴에는 회사에서 보이지 않던 피곤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흔들릴까 봐 저는 시선을 돌렸습니다.
“제가 대리님 불편하게 한 거면 그냥 말해주세요. 저도 더 이상 혼자 기대했다가 혼자 창피해지고 싶지 않아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져서, 저는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가 아주 낮게 말했습니다.
“불편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럼요?”
그는 제 눈을 잠깐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습니다.
“좋아져서 그랬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라고 있던 대답이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 기쁘다는 감정보다 먼저 화가 났습니다.
“좋아하면 왜 피해요?”
“제가 서연 씨한테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 말이 너무 쉽게 들려서, 저는 걸음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습니다.
“제가 뭘 해달라고 했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냥, 대리님이 왜 갑자기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는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운동장 옆 벤치를 가리켰습니다.
“잠깐 앉을까요?”
운동장 옆 벤치에서 처음 들은 그의 사정
우리는 운동장 조명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았습니다.
윤 대리님은 여전히 캔커피를 따지 않았습니다. 손안에서 굴리기만 하던 캔의 표면이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그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재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막상 옆에 앉아 있으니 손끝까지 긴장됐습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예전에 작은 가게를 하다가 정리 못 한 빚이 있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은행에서 빌린 돈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님 친구분들한테 빌린 돈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조금씩 갚아가고는 있는데, 두 분 수입만으로는 끝이 안 보여서요.”
그는 웃으려다 포기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잠깐 움직였습니다.
“제가 월급에서 매달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원 등록금은 제가 해결해야 하고요.”
“주말에 하신다는 일은요?”
그가 그제야 저를 바라봤습니다.
“대리운전 합니다. 금요일 밤이랑 토요일 밤에요. 수업 없는 평일 밤에도 가끔 하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러 장면이 한꺼번에 이어졌습니다.
회식 시작 전에 급하게 가방을 메고 나가던 모습. 퇴근 직전까지 숫자를 맞추면서도 누구와도 저녁 약속을 잡지 않던 모습. 피곤한 눈으로도 제 보고서 오류는 조용히 바로잡아주던 모습.
그가 저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
그는 원래 바른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붙잡고 버티느라, 자신의 저녁을 거의 갖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연애를 싫어해서 안 한 게 아니에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가 덧붙였습니다.
“서연 씨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좋았습니다. 회사에서 볼 때마다 더 보고 싶었고, 메신저 하나 보내놓고 답장 기다리는 것도 좋았어요.”
저는 손을 무릎 위에서 꼭 쥐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어지잖아요.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고, 주말에 만나자고 하고 싶고, 힘든 날에는 붙잡고 싶어집니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할 형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 시간도 제 마음대로 못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씩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를 피했어요?”
“네.”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요?”
그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들고 있던 캔커피를 벤치 아래에 내려놓았습니다.
“대리님.”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까지 미리 포기하지 마세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비싼 식당 데려가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주말마다 어디 가자고 한 적도 없어요. 대리님 상황이 힘든 것도 오늘 처음 알았고요.”
저는 울지 않으려고 조금 웃었습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저를 피해버리는 건 싫어요. 이유도 모른 채 혼자 부끄러워지는 것도 싫고요.”
그는 오랫동안 저를 바라봤습니다.
“서연 씨는 아직 몰라서 그래요. 기다리는 일이 생각보다 지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지치고 나서 판단할게요.”
그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습니다.
“생각보다 고집이 세네요.”
저도 작게 웃었습니다.
“대리님이 생각보다 많이 답답한 거예요.”
그날 밤, 그가 제 손을 처음 잡았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멀리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고, 가로등 아래 작은 벌레들이 빙빙 돌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들킬까 봐 조심스럽기만 하던 마음이, 그날 밤에는 이상할 만큼 선명해졌습니다.
윤 대리님은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벤치 옆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제 손 가까이에 자신의 손을 올렸습니다.
바로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손등이 제 손등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그게 너무 윤 대리님다워서, 저는 웃음이 날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먼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습니다.
손끝이 닿았습니다.
그제야 그가 제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았습니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능숙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망설인 사람처럼 손끝에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대답
저는 손을 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가락을 조금 더 맞잡았습니다.
그가 숨을 아주 작게 내쉬었습니다.
“저 정말 느릴 겁니다.”
“천천히 오세요.”
“주말마다 만나자고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수업 끝날 때 캔커피 들고 와요.”
그가 제 손을 잡은 채 웃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 좋아하게 되잖아요.”
“이미 좋아한다면서요.”
그의 표정이 멈췄습니다.
제가 너무 솔직했나 싶어 눈을 피하려던 순간, 그가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습니다.
“네.”
그가 아주 낮게 말했습니다.
“좋아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고작 며칠 피했다고 서운했던 마음도, 혼자 창피해했던 순간도, 그 사람이 제 앞에서 끝내 못 했던 말도 한꺼번에 올라왔습니다.
저는 괜히 고개를 숙이며 웃었습니다.
“이제 와서요?”
그가 미안한 듯 웃었습니다.
“이제라도 해도 될까요?”
그 말이 이상하게 다정해서, 저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다시 꽉 잡았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안아도 돼요?”
저는 말없이 한 걸음 가까이 갔습니다.
그가 천천히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회사에서 늘 반듯하고 빈틈없어 보이던 사람이, 그 순간에는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습니다. 제 어깨에 닿은 그의 손에는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고, 제가 조금이라도 물러나면 바로 놓아줄 것처럼 팔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의 셔츠 앞자락을 가볍게 잡았습니다.
섬유유연제 냄새와 캔커피 향, 강의가 끝난 뒤 남아 있던 늦은 밤 공기가 가까이 섞였습니다.
그는 제 머리 위로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너무 늦게 말해서.”
저는 그의 품 안에서 대답했습니다.
“다음부터는 피하지 마세요.”
그가 잠깐 웃었습니다.
“약속할게요.”
그날 우리는 키스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캠퍼스 벤치 옆에서 꽤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제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마음이 벅찼습니다.

대리운전을 마친 밤, 그가 먼저 저를 불렀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해서 윤 대리님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여전히 대학원 수업이 있었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대리운전을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니, 그 사람의 바쁜 생활까지 좋아하면 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습니다.
금요일 밤, 친구가 올린 데이트 사진을 보다가 문득 서운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도 보고 늦은 저녁도 먹는데, 저는 윤 대리님이 운전을 마치고 무사히 들어갔다는 메시지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열한 시 반이 넘어서야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저는 한참 화면을 보고 있다가 답했습니다.
“어디예요?”
“강변 쪽입니다. 이제 집에 가려고요.”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저 가도 돼요?”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그가 보냈습니다.
“늦었는데 괜찮겠어요?”
“대리님만 괜찮으면요.”
저는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택시를 탔습니다.
강변 근처 편의점 앞에 도착했을 때, 윤 대리님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종이컵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늘 반듯하게 잠그고 있던 셔츠의 맨 위 단추는 풀려 있었고, 머리는 밤바람에 조금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손에는 대리운전 기사 앱이 켜진 휴대폰이 들려 있었습니다.
저를 본 그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진짜 왔어요?”
“대리님이 먼저 보고 싶다고 말은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는 한동안 저를 보다가, 결국 웃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그 짧은 말이 더 가깝고 더 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편의점 컵라면으로 시작한 첫 데이트
우리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두 개를 사 들고 강변 벤치에 앉았습니다.
좋은 식당도 아니었고, 예쁜 조명이 있는 카페도 아니었습니다. 테이블은 조금 끈적했고, 컵라면 뚜껑은 바람 때문에 자꾸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이 이상할 만큼 좋았습니다.
윤 대리님이 종이젓가락으로 라면을 젓다가 말했습니다.
“이런 데이트도 괜찮아요?”
저는 삼각김밥 포장지를 벗기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대리님이 안 도망가고 제 옆에 있으면 돼요.”
그의 손이 멈췄습니다.
저는 괜히 민망해져 라면 국물만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습니다.
“서연 씨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 사람을 더 욕심나게 합니다.”
“욕심내도 돼요.”
그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망가지만 마세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안 도망갈게요.”
그가 먼저 다가온 첫 입맞춤
라면을 다 먹고 우리는 강변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멀리 다리의 불빛이 물 위로 길게 흔들렸고, 밤늦은 자전거 몇 대가 우리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제 옆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걸었습니다.
그러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조심스럽게 제 손을 먼저 잡았습니다.
캠퍼스 벤치에서는 제가 먼저 그의 손끝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윤 대리님이 먼저 제게 왔습니다.
그 사실이 좋아서, 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손 차갑네요.”
“대리님 기다리느라요.”
“다음에는 제가 기다릴게요.”
그 말에 저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도 저를 따라 멈췄습니다.
잠깐, 서로 말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조금 더 가까이 가도 돼요?”
무슨 뜻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제 앞에 한 걸음 가까이 왔습니다.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 조금 힘이 들어갔고, 다른 손이 제 팔꿈치 가까이에 아주 조심스럽게 닿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가 물러나는지 확인하듯 제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의 셔츠 소매를 살짝 잡았습니다.
그제야 그의 입술이 제 입술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습니다.
정말 짧은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빠르게 뛰었습니다.
입술이 떨어진 뒤, 제가 먼저 웃었습니다.
그가 당황한 듯 물었습니다.
“왜 웃어요?”
“우리 첫 키스가 컵라면 먹고 나서라서요.”
그도 결국 웃었습니다.
“그러게요. 분위기 없네요.”
“아니요.”
저는 그의 손을 다시 꼭 잡았습니다.
“저는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그는 잠깐 저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제 이마에 아주 짧게 입을 맞췄습니다.
“저도요.”
그날의 강변 바람과 편의점 불빛, 조금 짠 라면 국물 냄새, 그리고 서툴렀던 첫 입맞춤은 정말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피한 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이후에야 지난 일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탕비실에서 저를 보고도 물만 받아 나가던 날, 메신저에 “확인했습니다”라는 짧은 답만 남기던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일부러 다른 사람 옆으로 비켜 서던 날.
저는 그가 제 마음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윤 대리님은 차가워진 것이 아니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커진 만큼 자신의 사정까지 제게 짐처럼 얹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거리감이 호감의 증거는 아닙니다. 피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여전히 도와주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데 나에게만 유독 조심스러워지는지, 내가 멈추었을 때 그가 다시 말을 걸어오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이처럼 시선, 말투, 배려, 거리감이 여러 번 함께 나타나는 경우라면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와 친절을 구분하는 기준도 함께 살펴보면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눈을 피하면서도 다시 시선이 돌아오는 행동이 반복된다면, 직장 동료와 눈이 자주 마주치는 이유를 함께 확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남자 동료가 나를 피할 때 먼저 확인할 것
남자 동료가 갑자기 거리를 둔다고 해서 모두 같은 이유는 아닙니다. 저처럼 마음이 있는데도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물러나는 사람도 있고, 정말 부담을 느껴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눈맞춤이나 한 번의 친절보다, 그 뒤에도 같은 태도가 반복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윤 대리님은 저를 피하면서도 제가 곤란한 순간에는 끝내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 사람의 거리감은 차가움이 아니라,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망설임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요.
다만 직장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불편해 보인다면 기다려주는 것이 먼저이고, 마음이 있다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피하는 대신 솔직하게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그가 더 이상 저를 피하지 않게 된 이유
윤 대리님과 제가 연인이 된 뒤에도 그의 사정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빚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대학원 과제는 여전히 많았으며, 그는 여전히 주말이면 대리운전을 하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힘든 날이면 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번 주는 조금 버거울 것 같아요.”
“그래도 수업 끝나고 십 분만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삼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말을, 이제는 조금씩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그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빚을 대신 갚아줄 수도 없고, 그의 대학원 과제를 대신 해줄 수도 없고, 피곤한 몸으로 운전대를 잡는 밤을 모두 막아줄 수도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가끔 강의동 앞에서 캔커피를 들고 기다렸고, 늦은 밤에는 “오늘도 무사히 끝나면 알려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짧게라도 꼭 답했습니다.
“끝났습니다. 덕분에 덜 힘들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꼭 많은 시간을 받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빠듯한 하루 속에서, 그 사람이 겨우 비워낸 작은 자리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윤 대리님은 여전히 키가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회식보다 수업과 일을 먼저 챙기고, 여전히 혼자 해결하려는 버릇 때문에 가끔 저를 답답하게 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늦은 밤 대학 캠퍼스에서 캔커피를 들고 처음 마주 본 순간과, 운동장 옆 벤치에서 떨리던 손과, 대리운전을 마친 뒤 강변 편의점 앞에서 처음 웃으며 입맞추던 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남자 동료가 갑자기 나를 피한다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나를 탓하지는 마세요.
어떤 사람은 마음이 없어서 멀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잠시 뒤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진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피하는 대신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나도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도망가지는 말아요. 천천히 와도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