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기념 행사 날 아침, 사무실 문이 열리자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의 그녀가 들어왔습니다.
늘 검은 바지에 편한 가방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밝은 치마와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습니다.
저는 모니터를 켜다 말고 잠깐 손을 멈췄습니다.
좋아하는 직장 동료에게 다가가는 법을 고민하게 된 건, 바로 그날부터였습니다.
그녀를 처음부터 이성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입사 8년차 대리였고,
그녀는 입사 5년차 대리였습니다.
회사 생활이 오래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무뎌집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얼굴을 보고,
같은 회의실에 앉다 보면
누군가를 이성으로 바라보는 일도 조심스러워집니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동료,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
회의 자료를 함께 보는 사람.
처음에는 그녀도 제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일을 잘했습니다.
말투는 차분했고,
누군가 곤란해하면 조용히 먼저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회사에서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늘 바지를 입었고,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고,
가방도 대학생이 멜 법한 편한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예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세히 보면 얼굴이 참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남자 직원들도 그녀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그녀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복사기 앞에서 뒤에 선 사람에게 먼저 양보하던 모습.
신입 직원이 실수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무안 주지 않고 조용히 알려주던 모습.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말 없는 사람에게 먼저 묻던 모습.
그런 작은 마음들이 오래 남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어떤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 때문에
조금씩 마음이 갔습니다.
그날, 그녀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출근했습니다
그날은 회사 창립기념 행사 날이었습니다.
오후에는 강당에서 행사와 단체 사진 촬영이 있었고, 그녀는 모범사원 표창을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다른 옷차림이었지만, 제가 놀란 건 단지 옷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늘 검은 바지를 입던 그녀가
그날은 밝은 색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상의는 연한 크림색 블라우스였고,
머리도 평소처럼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습니다.
화장도 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서도
혼자 다른 계절에서 걸어온 사람 같았습니다.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의자에 앉기 전 치마 끝을 살짝 정리하는 모습까지
이상하게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누가 옆에서 말을 걸었는데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이상했던 건,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진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분명 같은 사람이었는데,
제가 몰랐던 분위기가 한꺼번에 보였습니다.
평소와 다른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늘 조용히 지나가던 사람이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 당황했습니다.
그녀는 그날 모범사원 표창을 받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상장을 받는 동안
회사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저도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녀가 치마를 입어서 예뻐 보인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달라지자 회사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회사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평소에는 그녀를 그저 일 잘하는 동료로만 보던 남자 직원들이
갑자기 그녀 쪽을 더 자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누군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오늘 같이 식사하실래요?”
퇴근 무렵에는 다른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혹시 저녁 약속 없으면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그녀는 늘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처음에는 정말 약속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 반복되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가까이 오는 관심이
그녀에게는 편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녀가 예뻐 보인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간 건
그날 치마를 입고 출근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전부터였습니다.
그녀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습.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도와주는 모습.
자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꼭 곁에 있어주는 모습.
저는 그런 것들이 좋았습니다.
다른 남자 직원들이 뒤늦게 그녀를 보고 들뜬 표정을 지을 때,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들이 그녀를 새삼스럽게 보는 걸 보면서
저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날 흔들렸지만,
그 마음이 단지 치마나 화장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민망하게 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사람.
직장 동료의 태도가 호감인지 단순한 친절인지 헷갈린다면, 한 장면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에서 여러 신호를 함께 확인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며칠 뒤,
부서 단체방에 부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순간 손이 멈췄습니다.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단정하고 차분하던 사람이라
그녀에게도 그런 슬픔이 갑자기 닥쳤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빈소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생각보다 더 작아 보였습니다.
평소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지만
눈가가 붉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데
이상하게 목이 막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말은 너무 가벼워 보였고,
“괜찮으세요?”라는 말은 괜찮을 리 없는 사람에게
너무 무심한 질문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말했습니다.
“늦게라도 다시 오겠습니다.”
그녀가 잠깐 저를 봤습니다.
“네?”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으실 것 같아서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을 한 번 깜박였습니다.
그날 다른 남자 직원들도 빈소에 왔습니다.
조문을 하고,
식사를 하고,
그녀에게 “나중에 밥 한번 먹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들 자기 방식으로 위로한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지금 밥 약속을 잡을 때는 아니지 않나.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흘 동안 퇴근 후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첫날은 조문객이 많았습니다.
둘째 날은 조금 줄었습니다.
셋째 날 밤에는 빈소가 한결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퇴근 후 다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습니다.
“또 오셨어요?”
“퇴근길이 크게 돌아가는 길은 아니라서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은 조금 멀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피곤해 보였습니다.
눈 밑은 조금 어두웠고,
입술은 말라 있었습니다.
상복 차림의 그녀는
회사에서 보던 사람과 또 달랐습니다.
예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그런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냥 오래 버티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빈소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뭘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조문객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식사 자리가 어수선하면 물컵을 채우고,
그녀가 잠깐 앉을 틈이 생기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옆에 있었습니다.
물컵이 비면 채우고,
사람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녀가 앉아 있으면 저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셋째 날 밤,
그녀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 안에는 피곤함도 있었고,
고마움도 있었고,
조금은 낯선 경계심도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봤습니다.
눈가가 다시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 말 들으면…”
그녀는 말을 멈췄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버티기가 조금 어려워져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조금 안 버텨도 됩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울었습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떨어뜨렸습니다.
저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 앞에 조용히 놓았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녀가 예뻐 보여서 신경 쓰인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저렇게 혼자 버티고 있는데,
그냥 돌아서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그녀가 먼저 식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며칠 뒤였습니다.
회사에서 그녀가 제 자리로 왔습니다.
평소처럼 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빛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번 주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는 순간 대답이 늦었습니다.
“네?”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요.”
“괜찮습니다. 그런 의미로 간 건 아니었어요.”
그녀가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더 대접하고 싶어요.”
그 말에 더는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회사 근처 작은 식당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장례식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무겁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그걸 아는 듯
메뉴 이야기를 하고,
회사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때 진짜 고마웠어요.”
저는 물컵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아니요. 계속 와준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 말에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녀는 창밖을 보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계속 오나 싶었어요.”
“부담스러웠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조금은요.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어요.”
그 말이 제 마음을 세게 건드렸습니다.
식당을 나왔을 때,
바람이 조금 차가웠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맥주 한잔 더 하실래요?”
저는 놀라서 그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조금 민망한 듯 웃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요.”
호프집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오래 감춰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작은 호프집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창가 자리에는 노란 조명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맥주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팀장님이 요즘 너무 예민하다는 이야기,
새로 들어온 신입이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
점심시간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밥 먹는 것도 일 같다는 이야기.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런 평범한 말들마저 오래 들렸습니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었습니다.
맥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참 동안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만 바라봤습니다.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왜 평소에는 늘 바지만 입는지.
왜 창립기념일에 치마를 입고 온 뒤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했는지.
왜 다른 남자 직원들이 다가오면
웃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는지.
궁금한 것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묻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한참 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그녀가 바지만 입고 다녔던 이유
“저 사실 대학생 때는 지금이랑 많이 달랐어요.”
저는 조용히 그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입가가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런 말이 싫지는 않았어요. 예쁘게 입는 것도 좋아했고, 짧은 치마도 자주 입었고, 메이크업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했어요.”
그 말이 조금 의외였습니다.
지금의 그녀는 늘 단정했고,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녀는 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좋게만 보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 순간,
저는 더 조용해졌습니다.
괜히 맞장구를 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힘들게 꺼내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학교 앞에도 있고, 집 근처에도 있고, 제가 자주 가던 길에도 있었어요.”
말끝이 조금 떨렸습니다.
저는 맥주잔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녀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습니다.
“그 일 이후에 아버지가 많이 놀라셨어요. 저를 지키려고 그런 거였겠죠. 치마 입지 말라고 하셨고, 화장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튀지 말고 다니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도 처음엔 아버지가 저를 지키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진짜 저를 숨기고 있더라고요.”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입사 면접 때도 아주 긴 치마를 입었어요. 사실은 예쁘게 입고 싶었어요. 짧은 치마도 입고 싶었고, 메이크업도 제대로 하고 싶었고요. 그런데 겁이 났어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지만 입었어요. 가방도 일부러 학생처럼 편한 것만 메고 다녔고요. 누가 저를 여자로 보는 게 무서웠어요.”
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꾸미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꾸미지 못하게 된 시간이 있었던 겁니다.
그녀가 예쁘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예쁜 자신을 드러내는 게 무서워진 시간이 있었던 겁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창립기념일에 치마 끝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날 그녀가 예뻐 보였던 건
단순히 치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숨겨둔 자신을
아주 조금 꺼내 보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말하기 힘들면 여기까지만 하셔도 됩니다.”
그녀가 저를 봤습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털어놓은 오래된 상처
“아니요. 오늘은 말하고 싶어요.”
그 말에 저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다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을 때까지.
“이상하죠?”
그녀가 작게 물었습니다.
“뭐가요?”
“이런 얘기요. 갑자기 너무 무겁잖아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사람이죠. 대리님이 이상한 게 아니고요.”
그녀의 눈가가 더 흔들렸습니다.
저는 아주 천천히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리님이 어떤 옷을 입든 상관없습니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습니다.
“정말요?”
“네.”
저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치마를 입어도 좋고, 바지를 입어도 좋습니다. 화장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저는 대리님이 어떤 모습이라서 좋았던 게 아닙니다.”
그녀는 말없이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도 한 번 숨을 고르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리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신입이 실수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무안 주지 않는 것도 좋았고, 누가 힘들어 보이면 조용히 먼저 챙기는 것도 좋았습니다. 말할 때 상대를 밀어붙이지 않는 것도 좋았고요.”
제 목소리가 조금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밝은 옷을 입지 않아도,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아도, 저는 이미 대리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급하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고 싶었습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녀가 스스로 숨을 고를 수 있게 두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조용히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습니다.
그녀는 냅킨을 받아 들고
눈가를 눌렀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
그러다 울면서 조금 웃었습니다.
“이상하게 대리님 앞에서는 자꾸 울게 되네요.”
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럼 제 앞에서는 조금 울어도 됩니다.”
그녀는 다시 저를 봤습니다.
그 눈빛이 아까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슬픔만 있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긴장하고 있던 사람이
처음으로 어깨에 힘을 푸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네.”
“대리님은… 저를 예쁘게 보려고 하지 않아서 편해요.”
그 말에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조금만 꾸미면 갑자기 달라져요. 말투도 달라지고, 시선도 달라지고요. 그런데 대리님은…”
그녀는 말을 잠깐 멈췄습니다.
“그냥 저를 계속 같은 사람으로 봐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겨우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장례식장에서 계속 와준 것도… 조금 덜 무서웠나 봐요.”
그 순간,
우리 사이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갑자기 뜨거워진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가까워졌습니다.
맥주잔 사이에 놓여 있던 거리가
조금 덜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습니다.
“오늘 말하고 나니까 조금 가벼워졌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잘하셨어요.”
“대리님은 왜 그렇게 조심해요?”
그 질문에 저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대리님이 다시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녀는 저를 오래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그 말이 제일 좋네요.”
그 한마디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호프집을 나왔을 때,
밤공기가 차가웠습니다.
그녀는 제 재킷을 손에 든 채
잠깐 망설였습니다.
“괜찮아요. 그렇게 춥진 않아요.”
저는 재킷을 다시 거두지 않았습니다.
“괜찮아 보여서 드리는 거 아닙니다.”
그 말에 그녀가 저를 올려다봤습니다.
아까 호프집 안에서 울던 눈가가
아직 조금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재킷을 받아 입었습니다.
제 재킷은 그녀에게 조금 컸습니다.
어깨선이 살짝 내려왔고,
소매 끝이 손등을 덮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가라앉았습니다.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런 식으로 올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큰길 쪽으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인지,
말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호프집 안에서 그녀가 꺼낸 이야기가
아직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예쁘게 입는 걸 좋아했다는 말.
스토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치마도,
메이크업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무서워졌다는 말.
아버지가 걱정해서 치마를 못 입게 했고,
그 뒤로 스스로도 바지만 입게 됐다는 말.
그 말들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녀가 꾸미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예쁜 자신을 숨기며 버틴 시간이 있었던 겁니다.
그녀가 먼저 손을 잡은 순간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신호등은 빨간불이었습니다.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우리 옆을 스쳐 갔습니다.
그때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오늘 얘기한 거… 후회 안 해요.”
저는 그녀를 봤습니다.
“다행입니다.”
“무서웠는데요.”
그녀는 제 재킷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작거렸습니다.
“말하고 나니까 조금 가벼워졌어요.”
저는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그럼 잘하신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리님은 왜 그렇게 조심해요?”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좋아해서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겨우 꺼낸 이야기를
제 고백으로 덮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돌아서 말했습니다.
“대리님이 다시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건너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먼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정말 아주 조심스럽게였습니다.
손끝이 먼저 닿고,
조금 뒤 손바닥이 닿았습니다.
그녀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손바닥이 닿은 자리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괜찮습니까?”
제가 물었습니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놓치지 않을 만큼만 잡은 손
“제가 잡은 거예요.”
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손을 세게 잡지 않았습니다.
그냥 놓치지 않을 만큼만 잡았습니다.
그녀도 손을 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호를 하나 그대로 보냈습니다.
건너야 할 길은 앞에 있었지만,
그 순간은 지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습니다.
“이상하게… 지금은 안 무서워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녀의 손을 아주 조금 더 감쌌습니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댔습니다.
짧은 포옹이었습니다.
누가 보면 잠깐 기대 선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어떤 고백보다 진했습니다.
제 재킷을 입은 그녀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손을 올릴까 말까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그녀의 등을 감쌌습니다.
그녀가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저는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만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실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더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거기서 멈추는 게 맞았습니다.
그녀가 먼저 다가온 만큼만,
그녀가 괜찮다고 말한 만큼만.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게 그녀에게 가장 편한 거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키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밤 이후,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좋아한다고 해서
항상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다려주는 쪽이 더 편한 마음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 그녀는 조금씩 자기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날 이후
회사에서 그녀를 보는 마음은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예전처럼 마음이 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천천히 가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바지를 입고 출근해도 좋았습니다.
밝은 옷을 입어도 좋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한 건 옷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정말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처음부터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은 평소처럼 검은 바지를 입고 왔고,
또 어느 날은 밝은 블라우스를 입고 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금요일 아침,
그녀는 짧은 치마에 단정한 메이크업을 하고 출근했습니다.
가방도 예전의 커다란 백팩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핸드백을 들고 있었습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몇몇 남자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향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누군가 식사를 제안했고,
퇴근 무렵에는 다른 직원이 커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불안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는 전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달라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 숨겨두었던 자기 모습을
아주 조금씩 다시 꺼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끔 제 쪽을 보고 웃을 때마다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녀가 저를
전처럼 멀리 두고 있지는 않다는 걸요.
탕비실에서 다시 떠오른 그날 밤
며칠 뒤,
탕비실에서 둘만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고,
저는 커피를 타러 들어갔습니다.
서로 평소처럼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날 재킷… 아직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아니요. 세탁해뒀어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습니다.
“향이 남아 있더라고요.”
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도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컵을 내려다봤습니다.
“이상한 뜻은 아니고요.”
저는 작게 웃었습니다.
“이상하게 안 들렸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눈맞춤 속에
그날 밤 횡단보도 앞에서 잡았던 손의 온기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그날… 고마웠어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도요.”
“뭐가요?”
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잡아줘서요.”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습니다.
그녀는 컵을 든 채 먼저 나가려다
문 앞에서 한 번 멈췄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잡았잖아요.”
저는 웃음이 나올 뻔했습니다.
하지만 웃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선명해서
그냥 마음속에 조용히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문을 열기 전,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여자 동료의 작은 말과 행동이 호감인지 헷갈린다면, 직장 여자 동료 호감 신호도 함께 읽어보면 감정선을 더 차분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저는 알았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아직 아무 약속도 없었습니다.
고백도 없었고,
연인이라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제 앞에서만큼은
자신을 숨기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저도 더 이상 그녀에게
빨리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화장을 하든 하지 않든,
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그녀가 어떤 옷을 입는지보다
어떤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지가 더 먼저 보였습니다.
예전보다 조금 편해진 얼굴,
말끝에 남는 작은 웃음,
그리고 가끔 저를 보고 멈추는 눈빛.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가 먼저 제 손을 잡았던 순간부터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날 이후,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만큼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