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연애 소문이 두려워 제가 먼저 피했습니다, 판촉행사 날 김 대리의 진심을 알았습니다

김도현 대리님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부터 몰랐던 건 아닙니다.

고백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제가 회의에서 흘리듯 말한 문장을 기억했고, 바쁜 날이면 제 자리에 마실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작은 차이가 더 잘 보였습니다.

저도 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사내연애 소문이 먼저 돌기 시작했습니다.

“김 대리님, 한 대리님 일에는 유난히 빠르시네요.”

처음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농담이었습니다. 며칠 뒤, 그 말은 제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이 뭐 있는 것 아니야?”
“그러니까 상품기획팀에서 마케팅 일까지 그렇게 잘 봐주지.”

그 순간 저는 김 대리님보다 제 이름이 먼저 걱정됐습니다.

제가 만든 기획안도, 제가 밤늦게까지 확인한 행사안도, 누군가에게는 ‘김 대리와 가까워서 편하게 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김 대리님이 싫지 않다는 말은 빼고,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뜻만 전했습니다.

그 뒤로 석 달 동안, 그는 제 말대로 정말 물러났습니다.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초가을 주말, 제품 판촉행사장에서 그 사람과 다시 같은 일을 맡기 전까지는요.

제품 판촉행사장에서 진열대 옆에 선 한 대리와 멀리서 바라보는 김 대리
소문이 두려워 제가 먼저 멀어졌지만, 판촉행사 날 다시 마주친 김 대리의 시선은 여전히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Table of Contents

김 대리님은 제 이름을 자주 불렀습니다

저는 건강음료 브랜드를 만드는 중견 식품회사 브랜드마케팅팀 입사 5년 차, 한서윤 대리입니다. 서른두 살이었고, 그해 봄에는 새로 출시할 곡물음료 판촉기획을 맡고 있었습니다.

김도현 대리님은 상품기획팀 입사 7년 차, 서른넷이었습니다.

그는 눈에 띄게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셔츠와 차분한 표정 때문에 처음 보면 기억에는 남았지만, 회식 자리에서 잔을 들고 돌아다니거나 아무에게나 친한 척 말을 거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 이름은 이상할 만큼 자주 불렀습니다.

“한 대리님 안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처음 그 말이 마음에 남은 건 4월 실무회의 때였습니다.

저희 팀은 신제품의 홍보 문구를 정하고 있었고, 저는 ‘매일 부담 없이 마시는 곡물음료’ 쪽으로 방향을 잡은 시안을 설명했습니다. 부장님은 자료를 넘기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너무 평범한데. 건강한 제품이면 기능을 좀 더 세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제가 준비한 근거를 찾느라 파일을 넘기고 있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 대리님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는 한 대리님 문구가 제품하고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부장님이 그를 봤습니다.

“왜?”

“이 제품은 매일 마시는 음료로 가야 합니다. 기능을 크게 약속하는 문장보다, 소비자가 바로 이해하는 문장이 낫습니다. 시음 의견에서도 단맛이 세지 않다는 점을 좋게 본 분들이 많았고요.”

그는 제 편을 든다는 표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료에 있는 수치만 짚었고, 제 기획이 왜 맞는지 설명했을 뿐이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저는 복사기 옆에서 그를 붙잡았습니다.

“아까 감사했어요. 김 대리님 아니었으면 제 안은 바로 빠졌을 것 같아요.”

그는 출력된 자료의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추며 말했습니다.

“좋은 안이라 남은 겁니다. 제가 있어서 남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제 편은 들어주셨잖아요.”

그의 손이 자료 위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편을 든 건 맞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괜히 웃었습니다. 돌아서서 자리로 가는 동안에도 귀가 뜨거웠습니다.

고백은 없었지만, 모른 척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쌓였습니다

신제품 출시 준비가 막바지로 갈수록 두 팀이 함께 일하는 날이 늘었습니다. 시식컵 수량을 맞추고, 제품 샘플을 확인하고, 판촉물에 들어갈 표현을 하나씩 검토했습니다.

어느 날은 오전부터 행사용 물품을 맞추느라 점심을 놓쳤습니다. 오후 두 시가 넘어 회의실에 들어가니 제 자리 앞에 삼각김밥과 보리차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거 누구 거예요?”

박선영 과장님이 자료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네 거야. 김 대리가 두고 갔어. 너 또 밥 안 먹고 버틸 것 같다고.”

“직접 주시지 왜요?”

박 과장님이 그제야 저를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직접 주면 네가 불편해할 수도 있잖아. 그런 것까지 생각하더라.”

저는 보리차 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다음 날 상품기획팀 쪽에서 그를 마주쳤습니다.

“저 점심 안 먹은 것도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서류철을 제게 건네며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오전 회의 끝나고도 자리에서 안 일어나시더군요.”

“제 자리까지 보고 다니세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그는 바로 웃지 않았습니다.

“네. 요즘은 좀 봅니다.”

그 순간 저는 서류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양손으로 다시 고쳐 잡았습니다.

며칠 뒤 내부 시음회가 끝났을 때는, 제가 가장 괜찮다고 평가한 샘플을 따로 챙겨주었습니다.

“한 대리님, 이거 가져가십시오.”

“뭔데요?”

“오늘 좋다고 하신 배합입니다. 집에서 차갑게 드시면 맛이 조금 달라집니다.”

저는 종이봉투를 받으며 웃었습니다.

“제가 좋다고 한 것도 기억하세요?”

그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제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한 대리님이 말한 건 대체로 기억합니다.”

그날 밤, 저는 냉장고에 넣어둔 샘플을 꺼내 마시고 한참 휴대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제품 맛을 물어보는 답장일 뿐인데도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짧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집에서 마셔보니 더 맛있네요.
김 대리님 말이 맞았어요.

몇 분 뒤 답장이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한 대리님이 좋다고 하실 것 같았습니다.

제품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그 문장은 너무 오래 남았습니다.

소문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거창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판촉용 패키지 박스를 검수하던 날, 제가 커터칼을 잘못 밀어 검지 끝을 살짝 베었습니다. 피가 조금 맺힌 정도였는데, 회의실 끝에 있던 김 대리님이 가장 먼저 구급함을 들고 왔습니다.

“손 보여주세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금방 멎어요.”

“작아도 소독은 하셔야 합니다.”

그가 밴드 포장을 뜯어 제 앞에 놓으려던 순간, 영업지원팀 이민석 대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도현 형, 한 대리님 다치니까 반응 속도가 다르네. 내가 종이에 베였을 때는 물로 씻으라고 하고 끝이더니.”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저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습니다. 김 대리님은 웃지 않았습니다. 밴드를 제 쪽으로 밀어놓고, 제 손가락에서 시선을 늦게 거뒀습니다.

그 뒤로는 사소한 일도 농담이 되었습니다.

제가 회의실에 늦게 들어가면 누군가 말했습니다.

“김 대리님, 이제 회의 시작하셔도 되겠네요.”

그가 신제품 자료를 제 책상에 직접 두고 가면, 옆자리 직원이 웃었습니다.

“그 자료, 마케팅팀 전체용 맞죠? 서윤 대리님 전용 배송 아니고?”

처음에는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대답 대신 귀만 조금 붉히는 모습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탕비실 문 앞에서, 제 이름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 탕비실 문을 열기 직전에 제 이름이 들렸습니다.

“둘이 아직 사귀는 건 아닌가 봐.”
“아니어도 김 대리는 마음 있지. 너무 티 나잖아.”
“그러니까 마케팅 쪽 부탁은 뭐든 빨리 봐주지. 한 대리도 편하겠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그대로 굳었습니다.

한 대리도 편하겠다.

저는 그 말이 싫었습니다. 제가 만든 문구도, 제가 붙잡고 있던 일정도, 제가 현장에서 혼자 책임져야 했던 일도 그 사람의 마음 하나로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리로 돌아오자 김 대리님에게 메신저가 와 있었습니다.

오전 시음 결과 정리본 보내드립니다.
손가락은 괜찮으십니까?

평소 같았으면 밴드 덕분에 괜찮다고 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은 손가락보다 탕비실에서 들은 말이 더 아팠습니다.

저는 한참을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습니다.

자료는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업무 외적으로 오해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회사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게 불편합니다.

보내고 나자 곧바로 후회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신이 싫은 건 아니라고. 오히려 좋아져서 더 겁난다고. 제 일이 누군가의 호감 덕분으로 보이는 게 무섭다고.

하지만 제가 보낸 문장에는 그 말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 분쯤 지나 답장이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는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게 더 아팠습니다.

사무실 노트북 메신저 화면 옆에서 거리두기 메시지를 보내고 고민하는 한 대리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까지 회사의 말거리가 될까 봐 먼저 선을 그었습니다.

[ad inserter=”block 1″]

제가 만든 거리를, 그는 끝까지 지켰습니다

김 대리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날 이후 먼저 안부를 묻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끝나도 제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고, 점심시간에 마주치면 다른 동료에게 하듯 짧게 인사하고 지나갔습니다.

“자료 메일로 전달드렸습니다.”
“행사 일정 변경사항 확인 부탁드립니다.”
“추가 문의는 팀 메일로 주시면 됩니다.”

정확하고 정중한 말만 남았습니다.

제가 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의실 문이 열릴 때마다 먼저 그 사람을 찾는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에 상품기획팀 사람들이 지나가면, 그중에 김 대리님이 있는지 무심한 척 확인했습니다.

어느 날 복도 모퉁이에서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도 잠깐 걸음을 늦췄습니다.

예전이라면 “점심 드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만 숙였습니다.

“안녕하세요, 한 대리님.”

그리고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저는 빈 복도에서 괜히 사원증 줄을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먼저 물러나 달라고 한 사람은 저였는데, 그가 정말 물러나자 하루가 길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쪽에서, 그는 제 일이 흔들리지 않게 도왔습니다

6월 초, 외부 행사에 설치할 홍보 패널의 문구에서 문제가 발견됐습니다.

최종 시안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표현이 그대로 출력에 들어갔고, 이미 제작은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팀장님은 회의실에서 제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한 대리, 이거 최종 확인 네가 한 거 아니야?”

“최종 파일은 제가 봤습니다. 다만 제품 표현은 상품 확인 단계에서도 함께…….”

“일단 원인 설명보다 해결부터 해.”

회의가 끝난 뒤 저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휴대폰만 쥐고 있었습니다. 인쇄업체에 다시 연락해야 했고, 수정 비용도 정리해야 했고, 팀장님께 보고할 말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상품기획팀 명의의 공식 메일이 들어왔습니다.

문구 변경 과정에서 상품 정보 확인과 마케팅 최종본 간 교차 검토가 누락되었습니다.
해당 건은 상품기획팀에서도 검토 책임이 있으며, 수정 표현과 근거자료를 첨부합니다.

책임이 제게만 몰리던 상황은 그 메일 한 통으로 정리됐습니다.

첨부파일을 저장하려는데 파일명 끝에 이름이 보였습니다.

표현수정_확인자료_김도현_최종

저는 메신저 창을 열었다가 닫았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보내려니, 제가 먼저 보낸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7월에는 작은 시음행사 현장에서 원료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고객이 알레르기 관련 정보를 확인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받은 안내자료만으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이민석 대리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습니다.

“한 대리님, 이 내용으로 안내하시면 됩니다. 공정 확인까지 받은 문구예요.”

“이 자료 어디서 받으셨어요?”

“도현 형이 며칠 전에 보내놨어요. 현장에선 이런 질문 나올 수 있으니까, 마케팅팀 곤란해지면 바로 보여주라고.”

고객에게 설명을 마친 뒤, 저는 대기실 구석에서 종이컵에 든 물만 오래 들고 있었습니다.

그날 김 대리님은 행사 담당도 아니었습니다.

제 행사가 취소될 뻔한 날에도, 그의 이름이 보였습니다

8월 말에는 제가 맡은 주력 판촉행사가 예산 조정 대상에 올랐습니다. 행사가 축소되면 몇 달 동안 준비한 일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제 평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결과 회의가 끝난 날, 박선영 과장님이 제 자리 옆으로 와 말했습니다.

“윤아야, 행사 예정대로 간대.”

“정말요? 본부에서 반대 심했잖아요.”

“상품기획팀에서 테스트 판매 자료를 다시 올렸어. 현장 시음이 있어야 구매 전환이 올라간다고.”

저는 묻지 않으려다가 결국 물었습니다.

“누가 정리했어요?”

박 과장님이 제 표정을 한 번 살폈습니다.

“김도현 대리.”

그날 오후, 자료실 앞에서 김 대리님을 마주쳤습니다.

“김 대리님.”

그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네, 한 대리님.”

“이번 행사 자료, 김 대리님이 정리하셨다면서요.”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습니다.

“상품 쪽 데이터가 필요해서 정리한 겁니다.”

“제 행사라서 한 건 아니고요?”

그 말은 묻자마자 후회됐습니다.

복도 끝 프린터가 종이를 뱉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는 잠시 후, 아주 평범한 인사처럼 말했습니다.

“행사가 진행돼서 다행입니다.”

그날 밤 저는 휴대폰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끝내 보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먼저 밀어낸 사람에게 다시 기대는 것 같아 겁났고, 그가 이미 마음을 접었을까 봐 더 겁났습니다.

석 달 뒤, 우리는 다시 같은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초가을 주말, 제가 맡은 제품 판촉행사가 열렸습니다.

시식대 세 곳과 경품 부스, 오후 온라인 판매 방송까지 잡혀 있는 큰 행사였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현장 동선과 제품 수량을 확인하고, 판촉 직원들에게 진행 순서를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상품기획팀 직원들이 도착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김 대리님을 보는 순간, 체크리스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제품 교육자료를 들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같은 회사에서 얼굴은 봤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다시 만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도 저를 발견했습니다.

걸음이 잠깐 느려졌습니다. 곧 업무용 얼굴로 돌아왔지만, 그 짧은 멈춤만으로도 그 역시 편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대리님, 제품 문의와 보관 상태 확인은 제가 맡겠습니다. 시식 직원 교육은 시작 전에 끝내겠습니다.”

“네. 저는 현장 동선하고 경품 진행 확인할게요.”

“문제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그 말뿐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설 때 제 명찰 끈이 뒤집혀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차렸습니다. 김 대리님은 분명 그걸 봤습니다. 시선이 제 목 근처에서 잠깐 멈췄다가 돌아갔으니까요.

예전 같았으면 알려줬을 겁니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제품 판촉행사장에서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한서윤 대리와 김도현 대리
피하듯 지내던 석 달 끝에, 우리는 판촉행사장에서 더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제가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행사는 시작하자마자 정신없이 돌아갔습니다.

시식컵은 채워놓기 무섭게 비워졌고, 경품 추첨대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습니다. 한쪽에서는 제품 설명을 다시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다른 쪽에서는 쇼핑백이 부족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저는 창고에서 추가 물품을 들고 나오다 벽에 기대 섰습니다. 아침부터 물만 몇 모금 마신 상태라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그때 판촉 직원 한 명이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왔습니다.

“한 대리님, 이거라도 드세요.”

“제가 부탁한 거 아닌데요?”

“상품 쪽 담당자분이 전달해달라고 하셨어요. 직접 드리면 안 드실 것 같다고.”

종이가방 안에는 반으로 자른 김밥과 보리차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봉투를 든 채 행사장 쪽을 바라봤습니다.

김 대리님은 시식대 옆에서 고객에게 원료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차분했고, 제 쪽은 보지 않았습니다.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는데 목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제 끼니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생방송을 앞두고, 제 이름이 책임자로 불렸습니다

오후 네 시 무렵, 온라인 판매 방송 촬영을 얼마 남기지 않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대 옆 대형 홍보 패널에 최종 승인본에서 삭제했던 표현이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대로 방송 화면에 잡히면 제품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문구였습니다.

“한 대리님, 이거 마케팅 쪽에서 최종 확인하신 거잖아요.”

현장 운영 담당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습니다.

바로 옆에는 촬영팀과 진행자가 서 있었고, 판촉 직원들도 제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춰 서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패널 앞을 막아서며 말했습니다.

“이 문구는 방송 화면에 나가면 안 됩니다. 촬영은 먼저 시음 장면부터 진행해 주세요. 그 사이 제가 교체본을 확인하겠습니다.”

현장 담당자가 되물었습니다.

“교체본이 지금 있습니까?”

제가 출력업체에 연락하려 휴대폰을 꺼낸 순간,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체본 있습니다.”

김 대리님이었습니다.

그는 제 앞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제 옆에 서서, 접힌 출력물을 제게 건넸습니다.

“오전 설치 때 문구 간격이 이상해서 예비본을 한 장 더 받아뒀습니다. 한 대리님, 확인해보십시오.”

저는 급히 패널을 펼쳤습니다. 정확한 최종 문구였습니다.

“이걸로 교체하겠습니다. 민석 대리님, 고정대 한쪽만 잡아주세요. 촬영팀은 예정대로 시음 컷 먼저 진행해 주세요.”

제가 말하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 반대편에서 패널 고정대를 잡았습니다. 급하게 모서리를 빼내는 순간, 그의 손등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김 대리님, 손…….”

“지금은 패널부터요.”

저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손을 움직였습니다.

촬영 시작 직전, 새 홍보판이 제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진행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품을 들고 방송을 시작했고, 현장 담당자도 더 이상 제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행사는 살렸지만, 그의 손등에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방송 조명이 켜진 뒤, 김 대리님은 피가 조금 밴 손등을 티슈로 눌러 닦고 제품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를 뒤따라 행사장 뒤 자재 통로로 들어갔습니다.

“김 대리님.”

그가 멈췄습니다.

“손부터 봐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여요.”

그는 제 얼굴을 잠깐 보다가 손을 뒤로 감췄습니다.

“행사 끝나고 보겠습니다.”

화가 나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늘 그렇게 혼자 결정해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비 패널 준비한 것도, 방금 아무 말 없이 제 옆에 선 것도요. 왜 저한테는 말하지 않아요?”

통로 끝에서 판촉 직원 두 명이 박스를 들고 지나갔습니다.

김 대리님은 그들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다시 저를 봤습니다.

“지금은 행사 중입니다, 한 대리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일단 현장부터 마무리하겠습니다.”

그가 돌아섰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그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행사장 안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ad inserter=”block 2″]

회식 자리에서, 박 과장님은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실무진끼리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긴 테이블 위에는 고기판이 놓였고, 사람들은 하루 종일 있었던 실수를 농담처럼 이야기했습니다. 판매 목표를 넘겼다는 말에 분위기는 한껏 풀려 있었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게서 가장 먼 쪽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는 술잔에 입만 살짝 댔고, 제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기보다 낮에 긁힌 그의 손등만 자꾸 보았습니다.

잠시 후 그가 휴대폰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넘길 행사 물품 중 반납할 것이 있어서요.”

민석 대리가 장난스럽게 붙잡았습니다.

“도현 형, 오늘 일은 다 했잖아. 술 한잔하고 가.”

김 대리님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빠지면 곤란한 물품이라 확인하고 가야 합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가 계단 아래로 내려간 뒤에도 저는 빈자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박선영 과장님이 제 옆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윤아야.”

“네.”

“너, 도현 씨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정말 몰라?”

저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과장님.”

“오늘 예비 패널, 우연히 나온 거 아니야. 도현 씨가 오전 설치 때 문구를 다시 확인하고 따로 출력 맡겨둔 거야.”

알고 있었던 일인데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으니 피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지난번 네 행사 예산 줄어들 뻔했을 때도 도현 씨가 자료 다시 만들어서 올렸어. 네가 곤란해질까 봐 자기 이름은 앞에 안 세웠고.”

저는 물컵을 만지작거리다 물었습니다.

“왜 저한테는 말 안 했대요?”

박 과장님이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똑같이 물어봤어.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뒤에서만 그렇게 챙기면 억울하지 않냐고.”

“뭐라고 했어요?”

“네가 자기 때문에 회사에서 더 불편해지는 건 싫다고 하더라.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처럼 보여도 괜찮다고.”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민석 대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습니다.

“도현 형 오늘 회식도 안 오려고 했어요. 한 대리님 불편할까 봐요. 박 과장님이 현장 담당자가 빠지면 더 이상하다고 해서 겨우 온 거예요.”

가게 안은 시끄러웠습니다. 누군가는 새 불판을 달라고 했고, 누군가는 2차를 어디로 갈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방을 집어 들자 박 과장님이 물었습니다.

“갈 거야?”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냥 있으면, 정말 끝날 것 같아요.”

식당 밖으로 나오자, 그가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내려오자 밤공기가 확 끼쳐왔습니다.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습니다. 전화를 걸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직도 좋아한다고 해야 할지.

그때 인도 끝에서 긴 가방 하나를 든 남자가 보였습니다.

김 대리님이었습니다.

접힌 배너와 남은 홍보물을 들고, 혼자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구두 굽 소리가 밤길에 또렷하게 울릴 만큼 빠르게 그를 따라갔습니다.

“김 대리님!”

그가 멈춰 돌아봤습니다.

“한 대리님? 아직 회식 중이실 텐데요.”

숨이 차서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오다가, 또 멈췄습니다.

석 달 동안 그 사람은 늘 저 거리에서 멈췄을 겁니다.

“손 보여줘요.”

“네?”

“아까 다친 손이요.”

“괜찮습니다.”

“왜 맨날 괜찮다고만 해요?”

제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박 과장님한테 들었어요. 제가 모르는 동안 뭘 했는지, 왜 제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는지, 오늘 회식도 왜 안 오려고 했는지.”

그가 들고 있던 배너 가방을 바닥에 세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안 들으시는 편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왜요?”

“들으시면 또 불편해지실 수 있으니까요.”

저는 한숨처럼 웃었습니다.

“정말 끝까지 그것만 생각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방에서 작은 밴드를 꺼냈습니다. 행사장에서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손 줘요.”

“이 정도 상처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해서 하는 거 아니에요.”

그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의 손등에 밴드를 붙이다가, 저는 더는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건물 외벽 옆 낮은 화단 턱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한참 망설이다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엄지 아래쪽에 얇게 긁힌 자국이 있었습니다.

밴드 포장을 뜯으려는데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제가 조금 날카롭게 말하자,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밴드를 상처 위에 얹고 손가락으로 눌렀습니다. 그의 손등은 따뜻했습니다.

석 달 전에는 그가 제 손가락에 밴드를 내밀었습니다. 그 작은 일 때문에 농담이 시작됐고, 저는 겁이 나 그를 밀어냈습니다.

이번에는 제 손이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밴드를 다 붙인 뒤에도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김 대리님이 제 손을 내려다봤습니다.

“한 대리님.”

“네.”

“이러시면 제가 마음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습니다.

저는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그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김 대리님이 싫어서 피한 거 아니에요.”

그의 입술이 잠깐 굳었습니다.

“알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왜요?”

“제가 물으면 한 대리님이 대답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습니다.

“저는 겁이 났어요. 회사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싫었고, 제가 한 일까지 김 대리님 덕분이라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어요. 그리고 혹시 우리가 잘못되면, 저는 회사를 다닐 자신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는 한참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없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눈물이 난 채로 웃었습니다.

“없어지지 않았잖아요.”

그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있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웃으려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게 더 나빴어요.”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제가 먼저 그렇게 말해놓고…….”

“한 대리님이 잘못한 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제가 더 미안하잖아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낮게 말했습니다.

“저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마주 잡았습니다.

그가 순간 숨을 멈췄습니다.

“이번에는 놓지 말아요.”

그의 손가락이 제 손을 감쌌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제가 빼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조금 더 단단하게.

“저를 좋아한다고, 이제는 제 앞에서 말해주세요”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화단 턱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용해진 건물 앞길을 몇 걸음 걸었습니다. 목에는 아직 행사 명찰이 걸려 있었고, 김 대리님은 구겨진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채 제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판촉행사가 끝난 밤 건물 앞에서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한 대리와 김 대리
석 달 동안 멀리서만 바라보던 김 대리의 손을, 판촉행사가 끝난 밤 처음으로 잡았습니다.

몇 걸음 뒤, 제가 먼저 멈췄습니다.

“김 대리님.”

“네.”

“저를 좋아한다고…… 이제는 제 앞에서 말해주세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래 참아서, 이제 와 꺼내도 되는 말인지 망설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듣고 싶어요.”

그가 천천히 저를 바라봤습니다.

“한서윤 대리님을 좋아합니다.”

가슴이 크게 내려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일을 참 꼼꼼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의에서 자기 안이 밀려도 끝까지 자료 찾는 모습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저는 애써 웃었습니다.

“그다음에는요?”

“점심 안 드시고도 괜찮다고 하는 것도, 긴장하면 볼펜 뚜껑을 계속 여닫는 것도, 혼자 속상한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자꾸 보였습니다.”

“그런 것까지 왜 봤어요?”

그는 잠깐도 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좋아하니까요.”

결국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

그가 다치지 않은 손을 들었다가 제 뺨 앞에서 멈췄습니다.

저는 작게 말했습니다.

“닦아줘도 돼요.”

그제야 그의 엄지가 제 눈가를 조심스럽게 스쳤습니다.

숨이 얕아졌습니다. 그의 셔츠 깃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하루 종일 행사장에서 뛰어다닌 사람의 열기와 곡물 샘플의 고소한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김 대리님.”

“네.”

“저 아직도 무서워요. 누가 또 말을 만들까 봐 무섭고, 우리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되고, 내일 제가 다시 겁먹을지도 몰라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그래도 김 대리님을 계속 밀어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저를 바라봤습니다.

제가 손을 놓지 않자, 그의 시선이 제 얼굴에서 맞잡은 손으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저는 먼저 그의 셔츠 소매를 가볍게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피하지 않을게요.”

그날 밤, 처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김 대리님은 바로 저를 끌어안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가까워졌을 때, 제 목에 걸린 행사 명찰이 그의 셔츠 단추에 가볍게 부딪혔습니다.

작은 플라스틱 소리에 제가 먼저 웃었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명찰이 방해하네요.”

그도 짧게 웃었습니다.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웃음이 잦아들자, 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가 제 손을 잡은 채 낮게 물었습니다.

“입 맞춰도 됩니까?”

저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조금 더 깊게 얽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입술이 닿았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습니다.

첫 입맞춤은 짧았습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답게, 그는 제가 놀라지 않았는지만 확인하듯 금방 물러났습니다.

그 순간 오히려 허전해져, 저는 아직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왜 또 멀어져요?”

그가 숨을 삼키듯 저를 바라봤습니다.

“놀라신 줄 알았습니다.”

“놀란 건 맞아요.”

“그러면…….”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오래 참았던 감정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제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했습니다. 그 작은 손길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빨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그가 아주 낮게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서윤 씨.”

회사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름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숨기지 않고.

저는 그의 셔츠 소매를 붙잡은 채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손등에는 제가 붙인 밴드가 조금 비뚤게 붙어 있었고, 제 목에는 아직 행사 명찰이 걸려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예쁜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정말 우리에게 일어난 일 같았습니다.

입맞춤이 끝난 뒤 그가 이마 가까이에서 낮게 말했습니다.

“천천히 하겠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습니다.

“천천히 해도 돼요. 대신 또 혼자 멀어지지는 마요.”

그가 제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안 그러겠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서, 그는 다시 김 대리님이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행사 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몇 명만 회사에 나왔습니다.

사무실 문 앞에 서니 어젯밤보다 더 긴장됐습니다. 그의 손을 잡았고, 입을 맞췄고,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다시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 김 대리님은 이미 회의 테이블에서 판매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 대리님.”

너무 차분해서 잠깐 서운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습니다.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회사에서는 한 대리님이 편한 만큼만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면, 그것도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웃음이 나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메시지가 하나 더 왔습니다.

그리고 점심은 같이 드셔도 괜찮습니까?

모니터 너머로 그를 보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데이터를 보는 척하고 있었지만, 펜 끝은 종이 위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저는 답장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사람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번졌습니다.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들킬까 봐 숨는 관계가 아니라, 회사 안에서 서로의 자리까지 지키기 위해 조심하는 관계로.

[ad inserter=”block 3″]

나처럼 사내연애를 고민하고 있다면, 너무 빨리 마음부터 밀어내지는 마세요

직장 동료에게 마음이 생겼을 때,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 올라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계속 만나야 한다는 것, 주변 사람들이 먼저 눈치채고 말을 보탤 수 있다는 것, 혹시 관계가 잘되지 않으면 일까지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

저 역시 그 모든 것이 무서웠습니다.

특히 제가 애써 만든 성과가 누군가에게는 ‘김 대리님이 잘 봐줘서 얻은 결과’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습니다.

직장 동료의 작은 배려가 정말 호감인지, 단순한 친절인지 먼저 확인하고 싶다면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 친절과 관심을 구분하는 법에서 반복되는 행동의 차이를 함께 살펴보세요.

그 사람이 싫은 건지, 상황이 무서운 건지 먼저 생각해보세요

사내연애가 부담스러우면 상대방 자체가 싫은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지, 오히려 자꾸 찾게 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김 대리님이 물러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피하고 싶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이 회사 안에서 함부로 이야기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요.

내 마음만큼, 내 일도 존중하는 사람인지 보세요

제가 김 대리님을 믿게 된 이유는 밥을 챙겨주거나 제 말을 기억해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불편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고, 상처받았다는 말로 저를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일하다 막혔을 때는 제 일을 대신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다시 해결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조용히 채워주었습니다.

직장 동료가 나에게만 유독 다르게 대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직장 동료가 나에게만 친절한 이유, 호감인지 배려인지 구분하는 법도 함께 읽어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다면, 차갑게 끊기 전에 진짜 이유를 말해보세요

제가 가장 후회한 것은 김 대리님에게 제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오해 살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달랐습니다.

“김 대리님이 싫은 건 아니에요.”
“사람들 말이 무서워요.”
“저도 마음이 있지만, 천천히 가고 싶어요.”

그 말을 조금 더 일찍 했다면, 우리는 석 달을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지 모릅니다.

호감이 있었지만 소문이나 부담 때문에 갑자기 거리를 두게 된 상황이라면 직장 동료가 갑자기 차가워진 이유, 호감이 부담으로 바뀐 순간도 함께 읽어보세요.

시작하기로 했다면, 서로의 평판과 업무를 먼저 지켜주세요

회사에서 시작된 관계는 감정만으로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업무 중에는 서로에게 특혜처럼 보일 행동을 피하고, 의견이 다를 때는 연인이 아니라 동료로서 말하고, 소문이 생겨도 상대의 평판을 해치지 않는 것.

그런 약속은 낭만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사내연애에서는 서로를 오래 편안하게 해주는 기준이 됩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소문 때문에 끝내지는 마세요

석 달 동안 저는 김 대리님이 저를 쉽게 포기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판촉행사 날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게 다가오지 않은 것이지, 제 편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행사가 끝난 거리에서 처음 잡은 김 대리님의 손등에는 제가 붙인 밴드가 조금 비뚤게 붙어 있었습니다.

제 목에는 여전히 행사 명찰이 걸려 있었고, 우리 옆에는 다음 날 반납해야 할 홍보물 가방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쁜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소문 때문에 끝내지 않기로 한 날, 제가 먼저 잡은 손이었으니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