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걸려온 직장 동료의 전화보다 조용히 기다려준 사람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휴대폰 화면에 김 대리님 이름이 떴을 때,
저는 바로 받지 못했습니다.

밤 9시 17분이었습니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머리는 아직 덜 말라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업무 전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요즘 제게 자주 말을 걸었습니다.

“점심 뭐 좋아해요?”
“퇴근하면 보통 뭐 해요?”
“남자친구는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친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대리님은 말도 잘했고,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저에게도 늘 다정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자꾸 사적인 쪽으로 넘어오자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싫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상하게 설레지는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먼저 생각났습니다.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신경 쓰는 사람은 김 대리님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부서의 박 대리님이었습니다.

박 대리님은 김 대리님처럼 자주 묻지 않았습니다.

밥 먹었냐고 쉽게 말하지도 않았고,
퇴근 후 뭐 하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곤란한 순간마다 조용히 옆에 있었습니다.

회의 자료가 꼬였을 때도,
팀장님 질문에 제가 잠깐 말문이 막혔을 때도,
복사기 앞에서 혼자 한숨을 쉬고 있을 때도.

박 대리님은 꼭 필요한 만큼만 다가왔고,
제가 괜찮아지면 다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그게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자꾸 제게 다가왔고,
박 대리님은 조용히 저를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꾸 박 대리님 쪽으로 마음이 갔습니다.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습니다.

받아야 하나.

안 받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혹시 정말 업무일까.

벨소리가 끊기기 직전,
저는 결국 전화를 받았습니다.

밤 아파트 거실에서 한국인 여성 직장인이 서서 직장 동료 김 대리의 전화를 받는 모습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밤, 휴대폰에 뜬 김 대리님의 이름은 단순한 업무 전화인지 다른 마음인지 저를 망설이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전화, 정말 업무 때문이었을까

“혹시 지금 괜찮아요?”

김 대리님이 먼저 물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무슨 일이에요?”

그는 잠깐 조용하더니 말했습니다.

“오늘 이벤트 기획안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요. 혹시 아이디어 좀 정리됐나 해서 전화했어요.”

업무 이야기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안심했습니다.

괜히 이상하게 생각한 건가 싶었습니다.

그날 저는 회사 프로젝트에 제출할 이벤트 기획안을 붙잡고 거의 하루 종일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정해져 있었지만,
막상 기획안으로 풀어내려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괜히 뻔한 행사처럼 보일까 봐 걱정됐고,
그렇다고 너무 튀는 방향으로 가면 회사 분위기와 맞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오후 내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문서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 김 대리님이 제 자리 옆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순간 고마웠습니다.

혼자 막혀 있던 상황이라
누가 옆에서 같이 봐준다는 말만으로도 조금 숨이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요? 저 지금 방향을 못 잡겠어서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김 대리님은 자신 있게 웃었습니다.

“이런 건 여러 명이 아이디어 내면 금방 나와요.”

그런데 그는 제 옆에 앉지 않았습니다.

잠깐 제 기획안 화면을 보더니,
저쪽 자리로 가서 후배 남자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이벤트 아이디어 좀 몇 개 뽑아봐. 해외 사례도 좀 찾아보고.”

후배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김 대리님은 다시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요. 금방 나올 거예요.”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서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바쁜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후배 직원도 자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고,
제 기획안은 여전히 제자리였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있었지만,
정작 제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대했다가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더 막막해졌습니다.

빈 문서 위에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건,
도와준다는 말을 믿고 잠깐 기대했다가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통화 속 김 대리님은 그 일을 다시 꺼냈습니다.

“기획안은 좀 풀렸어요?”

저는 잠깐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아직요. 내일 다시 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아이디어 필요하면 말해요.”

그 말은 다정했습니다.

분명 다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낮에 이미 한 번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있었지만,
정작 제 옆에서 같이 고민해준 시간은 없었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휴대폰을 바로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설레는 기분도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무거웠습니다.

김 대리님의 관심은 분명 저를 향해 있었지만,
제 마음은 자꾸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습니다.

어제 비워둔 기획안을 다시 붙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 USB 하나가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책상 위에 작은 USB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잘못 두고 간 줄 알았습니다.

USB 옆에는 짧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기획안 참고용입니다. 필요 없으면 지우셔도 됩니다.”

박 대리님 글씨였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박 대리님은 자기 자리에서 이미 노트북을 켜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화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USB를 꽂았습니다.

폴더 안에는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해외 브랜드 이벤트 사례,
국내 기업의 기존 프로모션 자료,
우리 회사 제품과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 메모,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실행 방식,
그리고 제가 어제 막혀 있던 부분을 풀 수 있는 기획안 구조까지.

그냥 참고자료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디서 막혔는지 알고 만든 자료 같았습니다.

파일 하나를 열 때마다
숨이 조금씩 트였습니다.

막막했던 문서에 드디어 길이 생기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막혔던 숨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USB를 들고 박 대리님 자리로 갔습니다.

“이거… 박 대리님이 해주신 거예요?”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어제 힘들어 보이셔서요.”

“언제 이걸 다 하셨어요?”

“퇴근 전에 조금 찾아봤고, 집에 가서 정리만 했습니다.”

정리만 했다고 말하기에는
자료가 너무 꼼꼼했습니다.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게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리님은 아무 말 없이
제가 당장 버틸 수 있는 걸 만들어두었습니다.

그 차이가 너무 선명했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제가 작게 말하자
박 대리님이 그제야 저를 봤습니다.

아주 짧은 눈맞춤이었습니다.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왜 어제 말 안 했어요?”

그가 잠깐 멈췄다가 말했습니다.

“부담스러워하실까 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습니다.

김 대리님의 전화보다,
박 대리님의 USB 하나가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말보다,
말없이 내 막막함을 알아준 사람이
더 깊게 들어올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회사 사무실에서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차림의 한국인 여성 직장인이 컴퓨터 화면을 보며 고민하고, 남자 직장인이 앉아서 자료를 도와주는 모습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던 순간, 박 대리는 말보다 먼저 제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보며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전화, 이번에는 변명이 더 작아졌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그날은 야근도 아니었고,
특별히 문제 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퇴근 후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가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습니다.

김 대리님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받기 전부터 조금 이상했습니다.

지난번처럼 급한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 여보세요.”

“혹시 지금 밖이에요?”

그가 물었습니다.

“네. 집 근처예요.”

“아, 목소리가 좀 울려서요. 밖인 것 같았어요.”

짧은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가 덧붙였습니다.

“오늘 회의 때 말한 업체 연락처, 혹시 제가 보내드렸던가요?”

그건 이미 메신저로 보내도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내일 회사에서 이야기해도 전혀 늦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직 안 받은 것 같아요. 메신저로 보내주시면 돼요.”

“네. 보내드릴게요.”

여기서 끝났어야 했습니다.

업무 이야기는 다시 사적인 안부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저녁은 드셨어요?”

그 말은 업무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장바구니를 내려다봤습니다.

계란, 우유, 컵라면, 귤 한 봉지.

혼자 사는 사람의 평범한 저녁거리였습니다.

“아직요. 지금 뭐 사서 들어가는 길이에요.”

“너무 대충 드시지 말고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직장 동료한테 그런 잔소리도 하나요?”

김 대리님은 잠깐 웃더니 말했습니다.

“그냥… 요즘 계속 피곤해 보이니까요.”

그 말은 다정했습니다.

분명 다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 일인데,
왜 저는 자꾸 조심스러워지는 걸까.

그때 마트 유리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장바구니를 든 채 전화를 받고 있는 저와,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김 대리님의 이름.

그 순간 이상하게 박 대리님이 떠올랐습니다.

박 대리님이라면
이 시간에 전화를 걸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았습니다.

대신 다음 날 아침,
제 책상 위에 조용히 자료를 올려두고
“어제 늦게 들어가셨죠. 오늘은 천천히 보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생각을 하자
제 마음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김 대리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속에서는 박 대리님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갈게요. 연락처는 메신저로 보내주세요.”

저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마무리했습니다.

통화 시간 2분 48초.

길지도 않은 전화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짧은 전화가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김 대리님의 다정함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다정함을 받을수록,
제가 누구에게 설레는지 더 선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내려놓았는데,
업무 메신저 알림이 하나 떠 있었습니다.

박 대리님이었습니다.

“내일 오전 회의 자료, 제가 앞부분 먼저 정리해두겠습니다. 오늘은 쉬세요.”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봤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 저녁을 물었고,
박 대리님은 제 내일을 덜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너무 또렷하게 느꼈습니다.

답장을 쓰려다가 몇 번을 지웠습니다.

고맙다고만 쓰기에는 마음이 너무 많이 움직였고,
다른 말을 쓰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는 짧게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마음이 좀 놓였어요.”

보내고 나서야
제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화가 울렸을 때, 제 옆에는 박 대리님이 있었습니다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야근이 끝나고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프린터 옆에 놓인 자료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박 대리님이 제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이것만 정리하고 가려고요.”

그는 제 손에 들린 두꺼운 파일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무거워 보여서요.”

그 한마디에 괜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박 대리님은 늘 그랬습니다.

무언가를 크게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버거워하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꼭 옆에 있었습니다.

저는 괜히 파일을 다시 잡으려 했습니다.

“제가 들어도 돼요.”

그러자 박 대리님이 낮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냥 제가 들게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들렸습니다.

별것 아닌 말인데,
그날은 왜 그렇게 마음이 내려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사무실 복도는 조용했고,
창밖에는 늦은 밤 사무실 불빛만 드문드문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화면에는 김 대리님 이름이 떠 있었습니다.

저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받아야 하나.

안 받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또 업무 핑계일까.

아니면 오늘도 저녁은 먹었냐고 물으려는 걸까.

짧은 순간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박 대리님은 제 휴대폰 화면을 보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살짝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그 배려가 오히려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자꾸 제 시간을 두드렸고,
박 대리님은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시선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너무 선명했습니다.

휴대폰은 계속 울렸습니다.

저는 손에 쥔 휴대폰을 더 세게 잡았습니다.

그때 박 대리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받기 싫은 전화면 안 받아도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목이 막혔습니다.

김 대리님은 자꾸 제 대답을 듣고 싶어 했고,
박 대리님은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남겨주었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그날 처음으로 똑바로 봤습니다.

휴대폰은 몇 번 더 울리다가 끊겼습니다.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박 대리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왜 안 받았냐고도,
누구 전화냐고도,
혹시 불편한 사람이냐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손에 들린 파일을 다시 고쳐 잡고 말했습니다.

“가요. 지하철 끊기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습니다.

유리문에 우리 둘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박 대리님은 제 옆에 서 있었고,
저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어깨가 아주 살짝 제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누가 타면 제가 밀리지 않도록
조용히 공간을 만들어주는 자세였습니다.

그게 더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게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박 대리님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제가 기다린 건 전화가 아니었습니다.

박 대리님처럼
내가 불편하지 않게 곁에 서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사 선배 결혼식에서 마음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회사 여자 선배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같은 부서 사람들도 대부분 참석하기로 했고,
김 대리님도,
박 대리님도 온다고 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단정하게 입고 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옷장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너무 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무심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밝은 색 원피스를 꺼냈습니다.

회사에서는 잘 입지 않던 옷이었습니다.

머리도 조금 더 신경 써서 정리했고,
귀걸이도 평소보다 작은 진주 귀걸이로 바꿨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르는데
이상하게 박 대리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생각을 한 제가 먼저 놀랐습니다.

결혼식장 로비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결혼식장 로비는 생각보다 붐볐습니다.

하객들은 모두 예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고,
꽃 장식이 놓인 포토월 앞에서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보던 얼굴들도
그날은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양복을 입은 남자 직원들,
원피스를 입은 여자 직원들,
평소보다 부드럽게 웃는 팀장님까지.

저는 축의금 봉투를 들고 로비에 서 있다가
김 대리님과 먼저 마주쳤습니다.

그는 저를 보더니 잠깐 말을 멈췄습니다.

정말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봤습니다.

그가 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려다
급히 시선을 돌리는 걸요.

“오늘… 분위기 다르네요.”

김 대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상해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예뻐요.”

그 말은 너무 바로 나왔습니다.

칭찬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축의금 내셨어요?”

박 대리님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도 평소와 달랐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셔츠 차림이었는데,
그날은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단정했고,
조용했고,
괜히 더 어른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박 대리님도 저를 보고 잠깐 멈췄다는 겁니다.

김 대리님처럼 바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아주 짧게 눈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잘 어울리십니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오래 남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예쁘다고 말했고,
박 대리님은 잘 어울린다고 말했습니다.

비슷한 칭찬인데도
제 마음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김 대리님의 말에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박 대리님의 말에는 그냥 고개를 숙이게 됐습니다.

“고마워요.”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습니다.

그때 김 대리님이 제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사진 같이 찍을까요? 회사 사람들 오기 전에.”

그 말에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 대리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단체 사진 찍을 때 같이 찍으시죠. 지금은 사람이 많아서 복잡합니다.”

말투는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제 앞에 아주 얇은 선을 그어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김 대리님은 웃으며 넘겼지만,
제 마음은 이미 박 대리님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꽃 장식이 있는 결혼식장 로비에서 밝은 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키 큰 한국인 여성 직장인과 그녀에게 다가오는 김 대리, 뒤쪽에서 바라보는 박 대리의 모습
회사 선배 결혼식장에서 저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고, 김 대리는 가까이 다가왔지만 박 대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로연 자리에서 두 사람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둥근 테이블마다 회사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와 웃음소리가 오갔습니다.

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꾸 느껴졌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가 어디 앉는지 먼저 봤습니다.

제가 음료를 가지러 일어나면
따라 일어났고,
제가 접시를 들고 돌아오면
“그거 무거워요? 제가 들어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다정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 박 대리님은 멀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물컵을 찾을 때,
제 앞에 새 물컵이 조용히 놓였습니다.

제가 매운 음식을 먹고 잠깐 기침했을 때,
냅킨이 제 손 닿는 곳으로 밀려왔습니다.

누가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박 대리님은 제 쪽을 보지 않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더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김 대리님은 제 옆에 오려고 했고,
박 대리님은 제가 불편하지 않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또 느꼈습니다.

누군가는 내 곁에 서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내가 편한 자리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였습니다.

신부 선배가 테이블마다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우리 지은이 오늘 너무 예쁘다.”

선배가 웃으며 제 손을 잡았습니다.

“회사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아.”

저는 민망해서 웃었습니다.

그 순간 김 대리님이 바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요. 저도 아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테이블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저는 괜히 물컵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때 박 대리님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습니다.

“선배님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아까 입장하실 때 다들 감탄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부 선배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그제야 숨을 조금 편하게 쉬었습니다.

박 대리님은 또 저를 곤란한 자리에서 빼내줬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조용한 배려가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결혼식 피로연 뷔페홀에서 화사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키 큰 한국인 여성 직장인과 가까이 다가오는 김 대리,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는 박 대리의 모습
피로연장에서는 김 대리가 제 곁으로 다가오려 했고, 박 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로연이 끝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남았습니다

피로연이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뷔페홀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만,
테이블 위 접시는 하나둘 치워지고 있었고,
회사 사람들도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고,
누군가는 근처에서 맥주 한잔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그때 김 대리님이 제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뭐하세요?”

너무 자연스러운 척 물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잠깐 웃었습니다.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사실 약속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잠깐 멈칫했습니다.

“아, 그래요?”

“네. 오래전부터 잡힌 약속이라서요.”

제 대답이 조금 어색했다는 걸 저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 대리님은 더 묻지 못했습니다.

마침 옆에서 남자 직원들이 김 대리님을 불렀습니다.

“김 대리, 우리 근처에서 맥주 한잔하자.”

“그래. 오늘 그냥 들어가긴 아쉽잖아.”

김 대리님은 제 쪽을 한 번 더 봤습니다.

조금 더 붙잡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방끈을 고쳐 잡고 한 걸음 물러서자,
그도 결국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네. 김 대리님도요.”

그는 다른 남자 직원들과 함께 호프집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박 대리님은 그 행렬 안에 없었습니다.

그는 피로연장 입구 근처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쪽을 바라보는 척했지만,
제가 혼자 남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친구 약속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들킨 것 같았습니다.

저는 괜히 가방 안을 뒤지는 척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했어요.”

박 대리님은 더 묻지 않았습니다.

왜 거짓말했냐고도,
김 대리님이 불편했냐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였습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했습니다.

잠시 뒤 그가 말했습니다.

“그럼 조금 걸으실래요?”

데이트하자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어디 가자고 강하게 끌어당기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게는
그 어떤 말보다 설레게 들렸습니다.

“잠깐만요.”

저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 못 이기는 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결혼식장을 나와 걷는 동안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결혼식장 밖으로 나오자
늦은 오후 공기가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았고,
거리에는 하객들이 남긴 향수 냄새와 꽃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박 대리님과 나란히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김 대리님과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리님 옆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결혼식장 근처 작은 공원까지 와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방향을 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 많은 큰길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공원 벤치에는 결혼식장을 나온 하객 몇 명이 앉아 있었고,
멀리서는 아이가 풍선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말했습니다.

“오늘 선배님 정말 예쁘더라고요.”

박 대리님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보니까… 좀 이상했어요.”

“왜요?”

저는 잠깐 웃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예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말하고 나서 제가 먼저 놀랐습니다.

너무 마음속에 있던 말이 그대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박 대리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 때문에
제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었습니다.

잠시 뒤,
그가 아주 낮게 말했습니다.

“오늘도 충분히 예쁘셨습니다.”

걸음이 멈출 뻔했습니다.

김 대리님도 오늘 예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박 대리님의 말은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김 대리님의 말은 바로 대답해야 할 칭찬 같았고,
박 대리님의 말은 오래 감춰둔 마음이 살짝 새어 나온 것 같았습니다.

저는 괜히 앞만 보며 말했습니다.

“박 대리님은 그런 말을 너무 조용히 해서 더 위험해요.”

그가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위험했습니까?”

“네. 조금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제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건 거의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후회되지는 않았습니다.

강변을 걷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공원길 끝에는 강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습니다.

박 대리님이 그쪽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날씨도 괜찮은데, 조금만 더 걸으실래요?”

저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더 걷고 싶었습니다.

강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물 위에는 노을빛이 조금 남아 있었고,
멀리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습니다.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회사 이야기,
결혼식 이야기,
처음 입사했을 때 힘들었던 일,
요즘 제가 왜 자꾸 지쳐 보였는지까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대리님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게 좋았습니다.

김 대리님은 자꾸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퇴근 후 뭘 하는지,
남자친구가 있는지.

그런데 박 대리님은 달랐습니다.

묻기보다 기다렸고,
제가 말하면 끊지 않았고,
제가 말하지 않으면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가 제 마음을 더 깊게 흔들었습니다.

팔이 스친 순간부터 거리가 달라졌습니다

걷다가 가끔 팔이 스쳤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가슴이 작게 내려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조금씩 피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둘 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강변 쪽에서 불어왔고,
제 원피스 자락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제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려는 순간,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갔습니다.

저는 놀라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고,
그 순간 발이 살짝 꼬였습니다.

박 대리님이 제 팔을 잡았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제 팔에 닿은 순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괜찮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괜찮아요.”

그는 바로 손을 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조금만요.”

박 대리님의 손이 멈췄습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직장 동료처럼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회사도,
김 대리님의 전화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잠깐 멀어진 것 같았습니다.

박 대리님이 낮게 물었습니다.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저는 그를 바라봤습니다.

“불편했으면… 이렇게 말 못 했을 것 같아요.”

제 목소리가 너무 작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알아들었습니다.

해질 무렵 강변 산책로에서 밝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은 한국인 여성 직장인과 정장 차림의 박 대리가 가까이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
강변길에서 살짝 휘청인 순간, 박 대리님이 제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주었고 그 짧은 온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놓았습니다.

놓았는데도,
그 손의 온기가 팔에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습니다.

어깨가 아주 살짝 닿았습니다.

박 대리님은 피하지 않았고,
저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접촉 하나 때문에
강변길이 너무 짧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김 대리님이었습니다.

저는 화면을 내려다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받았을 겁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혹시 업무일까 봐,
안 받으면 다음 날 회사에서 어색해질까 봐.

하지만 그날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김 대리님의 목소리보다
조금 전 강변에서 들었던 박 대리님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했던 말.

“불편했으면… 이렇게 말 못 했을 것 같아요.”

그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휴대폰은 몇 번 더 울리다가 끊겼습니다.

저는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메시지가 왔습니다.

“오늘 잘 들어가셨어요? 사진 보내드릴까요?”

사진이라는 말에
다시 결혼식장이 떠올랐습니다.

김 대리님이 비워둔 앞자리가 아니라
박 대리님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던 나.

사진을 찍는 순간
박 대리님의 팔이 아주 살짝 스쳤던 감각.

그리고 강변에서
그가 제 팔을 잡았다가 조심스럽게 놓던 순간.

저는 김 대리님에게 바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박 대리님과의 대화창을 열었습니다.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빈 입력창만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주 짧게 보냈습니다.

“오늘… 오래 걸었네요.”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습니다.

너무 티 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송된 뒤였습니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다리 아프진 않으십니까?”

그 문장을 보고
저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역시 박 대리님다웠습니다.

고백처럼 말하지 않고,
먼저 제 상태를 걱정하는 사람.

저는 한참 뒤에 답했습니다.

“아프지는 않아요. 이상하게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 짧은 기다림 동안
제 심장이 계속 뛰었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문장이 떴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 문장은 짧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함께 걸었던 모든 시간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뒤,
박 대리님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왔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걷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강변길에서 팔이 스쳤던 순간,
그가 제 팔을 잡았다가 놓던 순간,
조금 더 걸어도 되냐고 묻던 목소리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김 대리님의 전화는 끊겼는데,
박 대리님의 한 문장은 계속 제 안에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혼식 이후, 제 마음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서
김 대리님은 평소처럼 인사를 했습니다.

다만 전보다 조금 조심스러워 보였습니다.

저도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김 대리님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 다정했고,
저를 좋게 봐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혼식장과 강변길에서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과,
내가 그 사람의 시선을 기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걸요.

김 대리님이 제게 “예뻐요”라고 했을 때,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리님이 낮은 목소리로
“오늘도 충분히 예쁘셨습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대답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 차이를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김 대리님은 퇴근 후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업무 이야기를 나눴지만,
예전처럼 사적인 질문을 자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점이 고마웠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은 늘 어렵지만,
상대가 물러나주는 태도는
그 마음을 조금 덜 무겁게 만들어줍니다.

박 대리님과도 당장 크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조심했습니다.

회의실에서는 평소처럼 자료 이야기를 했고,
복도에서는 짧게 인사했고,
사람들이 있을 때는 서로 오래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만 아는 변화는 있었습니다.

박 대리님이 제 자리 옆을 지나갈 때
예전보다 조금 천천히 걷는다는 것.

제가 무거운 파일을 들고 있으면
이제는 묻지 않고 절반을 가져간다는 것.

제가 고개를 들면
그가 예전처럼 바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괜히 휴대폰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는 것.

김 대리님의 전화가 올까 봐가 아니었습니다.

박 대리님의 짧은 메시지 하나가
혹시 와 있을까 봐였습니다.

단체사진 속 기울어진 마음을 보았습니다

며칠 뒤,
회사 단체 메신저방에 결혼식 사진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신부 선배는 눈부시게 예뻤고,
회사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박 대리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사진을 확대했습니다.

사진 속 저는 정말 아주 조금,
박 대리님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박 대리님은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팔은 제 쪽으로 아주 조금 여유를 남겨둔 자세였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날의 공기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신부 선배의 드레스,
피로연장의 웃음소리,
김 대리님의 시선,
박 대리님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강변에서 잠깐 닿았던 손의 온기까지.

그때 메신저 알림이 울렸습니다.

박 대리님이었습니다.

“사진 다시 올라왔네요.”

저는 한참 망설이다가 답했습니다.

“그러게요. 저 이번엔 진짜 티 안 나죠?”

보내고 나서 또 후회했습니다.

왜 자꾸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박 대리님 앞에서는 완전히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답장은 조금 뒤에 왔습니다.

“이번에도 조금 납니다.”

저는 숨을 멈췄습니다.

곧이어 한 줄이 더 왔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도 그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으니까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전화보다 오래 남은 건 조용한 배려였습니다

이건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었고,
사귀자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어떤 고백보다 더 조심스럽고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누군가는 자꾸 제 마음을 확인하려 했고,
누군가는 제 마음이 들킬까 봐 조심해주었습니다.

누군가는 제 곁에 오려고 했고,
누군가는 제가 머물 자리를 남겨주었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알고 나서야
제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알게 됐습니다.

퇴근 후 걸려오는 전화가 모두 마음을 흔드는 건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조용한 배려가 모두 사랑은 아니어도,
어떤 배려는 오래 마음에 남아
사람을 조금씩 흔들 수 있다는 걸요.

퇴근 후 연락이 호감인지 헷갈린다면, 전화 하나만 따로 보지 말고 회사 안에서의 말투와 배려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더 넓은 기준은 직장 동료 호감 신호를 확인하는 기준에서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마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기다린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박 대리님처럼
제 마음이 편히 놓일 자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이 제 옆에 조용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회의실 문이 열릴 때마다
저는 괜히 고개를 듭니다.

복도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리면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도 귀가 먼저 반응합니다.

그날 저는 사진 한 장과 강변길에서 알게 됐습니다.

마음은 말보다 먼저 몸이 알고,
고백보다 먼저 시선이 알고,
가끔은 아주 작은 기울어짐과
짧은 손의 온기 하나로도
충분히 들킬 수 있다는 걸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같은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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