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복사기 옆에 놓인 박스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잠깐 가져다 둔 이삿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박스 옆면에 붙은 이름표를 보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지윤.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박스 안에는 그녀가 쓰던 머그컵, 작은 탁상달력, 늘 들고 다니던 파란 파일철이 차례로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옆자리 동료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래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저는 그녀가 퇴사한다는 사실보다 제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워졌습니다.
순간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사무실 안의 키보드 소리도 멀어졌습니다.
마지막 출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미뤄온 말들이 한꺼번에 목까지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복도에서 마주치면 괜히 걸음을 늦췄고, 탕비실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리면 커피를 한 잔 더 타는 척했습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우연히라도 마주치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 작은 순간들이 제 하루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즐거움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못 해봤는데, 이제는 얼굴조차 보기 어려워진다니요.
그녀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뒤늦게 마음을 꺼내는 일이 고백인지, 부담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녀의 작은 반응들이 단순한 친절인지 호감인지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런 신호를 더 넓게 봤어야 했고, 비슷한 상황이라면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를 함께 확인해보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그 길 앞에 제 감정을 얹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괴로웠습니다.
오늘 말해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참아야 할까.
저는 하루 종일 일을 하는 척했지만, 화면 속 글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의 부서에서는 마지막 송별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우리는 다른 팀이었지만 같은 날 입사한 동기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팀 직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날 입사한 동기였습니다.
입사 첫날, 신입사원 교육장은 낯선 얼굴들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뒤쪽 자리를 찾고 있었고, 그녀는 제 쪽을 보고 살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기 자리 비었어요.”
정말 별것 아닌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오래 남았습니다.
낯선 회사, 낯선 사람들, 앞으로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첫날에 그녀의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나중에 그녀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도 그날 기억해요. 당신이 너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어서, 괜히 말 걸고 싶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조금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작은 친절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첫 장면이 될 줄은요.
처음에는 그저 같은 해에 들어온 동기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서가 달라 매일 같이 일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층을 썼고 복도에서 마주칠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바쁘시네요.”
“점심 드셨어요?”
“회의 들어가시나 봐요?”
그런 말을 늘 밝게 건넸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인사가 이상하게 기다려졌습니다.
아침에 그녀를 마주치면 하루가 조금 가벼워졌고, 바쁜 날에도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걸면 이상하게 숨이 놓였습니다.
그러다 우리 둘이 제대로 가까워진 건 입사 2년 차 때 맡았던 협업 프로젝트 때문이었습니다.
협업 프로젝트를 하면서 마음이 가까워졌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두 부서가 함께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실무 자료를 정리했고, 그녀는 일정과 거래처 요청사항을 조율했습니다.
처음에는 업무 때문에 자주 메신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표는 이렇게 정리하는 게 더 보기 좋지 않을까요?”
“그럼 제가 발표 순서에 맞춰 다시 배치해볼게요.”
그런 식의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잘 통했습니다.
저는 숫자와 근거를 먼저 봤고, 그녀는 그 자료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서로 보는 방향은 달랐지만, 이상하게 결과물은 더 좋아졌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둘 다 동시에 한숨을 쉬고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오늘 진짜 정신없었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저도 웃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도요. 같이 일하기 편했어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냥 다른 팀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같이 일하면 마음이 편한 사람.
괜히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힘든 회의가 끝난 뒤에도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야근하던 밤마다 그녀의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제가 야근하는 날이면 탕비실에서 그녀를 마주칠 때가 있었습니다.
“또 야근이에요?”
“네. 오늘은 보고서가 좀 늦어져서요.”
그러면 그녀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내일도 회사 와야 하잖아요.”
대단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퇴근길까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녀가 지나간 뒤에도 저는 한참 동안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한 번은 야근이 끝난 밤이었습니다.
사무실에는 몇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복도 불도 절반쯤 꺼져 있었습니다. 저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나오다가 창가에 서 있는 그녀를 봤습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제가 묻자 그녀가 웃었습니다.
“그러는 당신도 아직 안 갔잖아요.”
우리는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습니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말도 늦은 밤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울에 비친 그녀와 제 모습이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우리 입사한 지도 벌써 꽤 됐네요.”
“그러게요. 처음엔 이렇게 오래 다닐 줄 몰랐습니다.”
“저도요.”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 많았어요.”
저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그냥 동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조금 더 다른 뜻이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겁이 나서 모른 척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그녀가 먼저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말하지 못했구나.
서로 마음이 있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둘 다 너무 조심스러웠습니다.
같은 날 입사한 동기였고, 회사 안에서 자주 마주쳤고, 서로 다른 팀이지만 협업할 일도 있었습니다. 괜히 고백했다가 어색해지면, 다음 날부터 같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조차 불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녀도 아마 비슷했을 겁니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작게 물었습니다.
“오늘 점심은 누구랑 드세요?”
저는 순간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 말이 그냥 묻는 말인지, 같이 먹자는 뜻인지 헷갈렸습니다.
“아마 팀 사람들이랑 먹을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잠깐 웃었습니다.
“그렇구나.”
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때 제가 한 번만 더 용기를 냈으면 됐습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드실래요?”
그 말을 했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못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다가, 꼭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멈췄습니다.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서로에게 미루는 동안,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회식이 끝날 때까지 음식점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정말 회사를 떠난다는 걸 확인한 건, 그날 오후였습니다.
복도 끝에서 그녀가 책상 위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작은 화분, 노트, 컵, 서류 몇 장이 하나씩 종이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자리 정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책상 위가 너무 깨끗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부서 입구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지윤 씨… 자리 정리하시는 건가요?”
그 직원이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아, 모르셨어요? 지윤 씨 오늘까지예요. 회사 그만두세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요?”
“네. 오늘 저녁에 송별회 겸 회식 있어요. 부서 사람들끼리 마지막으로 밥 먹기로 했어요.”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뒤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메일을 열어놓고도 글자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니터에는 업무 메일이 떠 있었지만, 제 머릿속에는 한 장면만 반복됐습니다.
그녀가 상자에 머그컵을 넣던 모습.
작은 탁상달력을 접던 손.
늘 들고 다니던 파란 파일철을 마지막으로 내려놓던 모습.
그 모습이 꼭 이별을 준비하는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그녀가 정말 떠나는구나.
그리고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구나.

그날 저녁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오늘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번 못 해봤는데,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의 부서 사람들이 회사 근처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따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회식은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부서 사람들의 자리였고, 저는 그 안에 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점 맞은편 길가에 섰습니다.
스스로도 우스웠습니다.
고백하지도 못한 사람이, 들어가지도 못할 회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를 보고 싶었습니다.
잘 지내라는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지내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문밖에서 그녀의 마지막 저녁을 지켜봤습니다
음식점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잔을 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었고,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밖에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회사 저녁인데, 저는 그 안에 없었습니다.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다가가지도 못하면서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
고백하지도 못하면서 잊지도 못하는 사람.
그게 그날의 저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습니다.
“잘 다녀와요.”
“몸 조심하고요.”
“연락 꼭 해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이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역 쪽으로 흩어지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작은 상자를 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때 저는 더는 숨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습니다.
“어? 여기 계셨어요?”
저는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녀가 보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제 얼굴을 잠깐 바라봤습니다.
마치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요.
저는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짐이 무거워 보이네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웃었습니다.
“괜찮은데…”
“역까지라도요.”
그녀는 결국 작은 상자를 제게 건넸습니다.
상자를 받아 드는 순간,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 안에는 그녀가 회사에서 보낸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머그컵, 파일, 작은 물건들.
그리고 제가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까지요.
그렇게 우리는 회사 근처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회식이 끝난 거리에는 간판 불빛이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우리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짧은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이별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역까지 걷는 길에 마지막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가 뭘요. 오히려 제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가 잠깐 웃었습니다.
“항상 그렇게 말하네요.”
“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꼭 한 걸음 뒤에서 하는 것 같아서요.”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자리 안 계시더라고요.”
“제 자리요?”
“네. 잠깐 들렀는데 없으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것도 못 하겠어서, 잠시 회사 밖으로 나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아…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책상에 작은 선물을 두고 가려고 했는데 안 계셔서요. 같은 팀 분께 부탁드렸어요.”
저는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선물이요?”
“네. 별건 아니에요. 그냥… 그동안 고마웠다는 뜻으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내일 출근하시면 꼭 열어보세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냥 고마움의 선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끝내 말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서로 먼저 꺼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역 앞에서 끝내 말하지 못했습니다
역 입구가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녀가 제게서 짐을 받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면 괜찮아요.”
저는 상자 손잡이를 바로 놓지 못했습니다.
상자 하나를 건네는 일뿐인데, 그 손잡이를 놓는 순간 그녀와의 시간까지 전부 놓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도 제 손을 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제 손 위에 자기 손을 살짝 얹었습니다.
그 짧은 손길에 저는 숨을 멈췄습니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귀던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오래된 연인처럼 헤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손이 제 손등에 닿은 시간은 아주 짧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짧은 순간 때문에,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손등을 바라보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저는 그 손길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하더라도 이것만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윤 씨.
저 사실 오래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입사 첫날부터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프로젝트 하던 밤마다 더 좋아졌고, 야근 끝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마다 말하고 싶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핑계로 더 보고 싶었고,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치면 하루가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습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해외로 떠나 공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 마음을 얹는 것이 사랑인지, 욕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후회할 말을 했습니다.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잠깐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 눈빛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마치 제가 다른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사람 같았습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우리 사이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당신도 잘 지내요.”
그녀가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뒤돌아볼까 봐.
혹시라도 다시 나를 봐줄까 봐.
그리고 정말 한 번, 그녀가 뒤를 돌아봤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짧은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때도 저는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은 가만히 두면 그대로 남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말할 기회부터 사라진다는 것을요.
그때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제 책상 위에는 작은 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저는 제 책상부터 봤습니다.
평소 같으면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을 텐데, 그날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말한 선물이 정말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 모니터 옆에는 작은 종이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꽃다발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팀원이 말했습니다.
“어제 옆 팀 지윤 씨가 두고 가셨어요. 꼭 전달해달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손끝이 조금 떨렸습니다.
종이봉투 안에는 작은 만년필 하나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만년필을 보는 순간, 예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회의실에서 급하게 메모해야 할 때마다 제가 그녀에게 펜을 빌리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또 안 가져오셨어요?”
저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다음엔 꼭 챙기겠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늘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다음에도 빌려드릴게요.”
그 말이 그냥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편지 첫 줄을 읽는 순간, 그 말이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서 쓸 때마다 펜을 자주 빌리시던 게 생각나서요.”
저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제 책상 위에 두고 간 것이었습니다.
편지 속에는 놓쳤던 신호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는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커피 마시자고 했던 날, 사실은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야근 끝나고 같이 내려가자고 한 날도, 사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점심 누구랑 먹느냐고 물었던 날도, 같이 먹자고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그런데 늘 제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가면, 당신은 예의 있게 한 걸음 물러났어요.”
“그래서 저도 더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것을요.
그녀도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놓쳤습니다.
아니, 어쩌면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릅니다.
겁이 많아서.
회사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편지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 일했던 시간은 제 회사 생활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책상 위 꽃다발은 작았습니다.
만년필도 특별히 비싼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제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은 선물이 아니라, 그녀가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을 그녀가 떠난 뒤에야 알아버렸습니다.

연락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저는 그날 퇴근하자마자 그녀에게 연락했습니다.
메신저 프로필은 남아 있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도 저장되어 있었지만,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켜놓고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문자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웠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미 떠나는 사람에게 뒤늦은 고백을 보내는 일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결국 제가 보낸 문장은 아주 짧았습니다.
“편지 봤어요. 고마워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한 번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답장은 다음 날 새벽에 왔습니다.
“죄송해요. 오늘 출국해요.”
그 한 줄을 보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떠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도 너무 늦은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는 또 한 번 가장 안전한 말을 골랐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꼭 좋은 시간 보내세요.”
잠시 뒤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고마워요. 당신도 잘 지내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했고, 저는 그녀가 없는 회사에 남았습니다.
회사는 예전과 같았습니다.
복도에는 같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탕비실 커피 맛도 그대로였고,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같은 층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제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지 않게 됐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셔도 더 이상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던 습관도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준 만년필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습니다.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보고서를 쓸 때마다 그 만년필이 생각났습니다.
결국 어느 날 저는 서랍을 열었습니다.
만년필을 손에 쥐는 순간, 편지 속 문장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사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저는 알았습니다.
우리가 놓친 건 하루의 타이밍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면서도 모른 척했던 그 많은 날들이었다는 걸요.
5년 뒤, 전 회사 근처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저도 회사를 옮겼고, 일은 바빠졌고, 그녀가 없는 하루에도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가끔 비슷한 향수 냄새가 나면 그녀가 생각났습니다.
누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점심 드셨어요?”라고 물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비 오는 날 회사 앞을 지나면, 우산 하나 없이 뛰어가던 입사 초년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서랍 속에는 여전히 그녀가 남기고 간 만년필이 있었습니다.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만년필은 제가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의 증거 같았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 회사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습니다.
회의가 예상보다 일찍 끝났고, 저는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녀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카페였습니다.
한때는 혹시 그녀가 있을까 싶어 일부러 천천히 지나가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정말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혹시… 맞죠?”
돌아보는 순간, 저는 그대로 멈췄습니다.
지윤이었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저는 바로 알아봤습니다.
조금 더 차분해졌고,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지만, 웃을 때 눈가가 부드럽게 접히는 모습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녀도 저를 보고 잠깐 말을 잃은 듯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먼저 웃었습니다.
저는 겨우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5년이 사라졌습니다.
퇴사하던 날 밤, 역 앞에서 놓지 못했던 상자 손잡이.
책상 위에 남겨져 있던 편지.
새벽에 도착했던 출국 문자.
그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되살아났습니다.
카페에서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학은 어땠는지, 언제 돌아왔는지, 지금은 어디서 일하는지.
그녀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새 회사에 들어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사실 가장 궁금한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혹시 결혼했는지.
누군가 곁에 있는지.
그때의 편지를 아직 기억하는지.
차마 묻지 못하고 커피잔만 만지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저 아직 혼자예요.”
저는 순간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웃었습니다.
“왠지 그걸 제일 궁금해할 것 같아서요.”
저도 조심스럽게 웃었습니다.
“저도 아직 혼자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저를 봤습니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저는 우리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이라는 말이 이렇게 크게 들릴 줄 몰랐습니다.
그 순간 저는 느꼈습니다.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요.
그날 저는 5년 늦은 고백을 했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끝날 줄 알았던 만남은 저녁 식사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전 회사 근처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여기 그대로네요.”
“그러게요. 우리만 많이 달라졌네요.”
그녀가 웃었습니다.
“정말 달라졌을까요?”
그 말에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달라진 건 많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입사 초년의 어설픈 동기가 아니었고, 그녀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었고, 저는 여러 번 회사를 옮기며 조금은 단단해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선 마음만은 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긴장됐고, 그녀가 웃으면 아직도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회사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던 작은 공원 입구에 섰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때 편지 읽고 무슨 생각 했어요?”
저는 숨을 한번 고르며 그녀를 봤습니다.
이번에는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5년 전에는 피했습니다.
회사라는 핑계를 댔고, 타이밍이 아니라는 말을 했고, 그녀의 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 뒤에 제 겁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후회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았습니다.
“많이요?”
“네. 많이요.”
저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도 지윤 씨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입사 첫날부터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날부터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리 비었다고 말해준 것도, 프로젝트 하면서 같이 늦게까지 일했던 것도, 야근 끝나고 엘리베이터 앞에 같이 서 있던 것도 전부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계속 말했습니다.
“커피 마시자고 했던 날도, 점심 누구랑 먹느냐고 물었던 날도, 사실은 다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겁이 났습니다. 괜히 제가 다가갔다가 지윤 씨가 불편해질까 봐요. 회사에서 소문이 날까 봐요. 거절당하는 것보다, 당신이 저를 피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그날 못 했던 이유를 처음으로 말했습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요?”
그 질문에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역 앞에서 그녀가 뒤돌아보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손 위에 잠깐 얹혔던 그녀의 손.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말밖에 못 했던 제 목소리.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날은 정말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했어요?”
“붙잡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요. 유학 가는 사람에게 뒤늦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랑이 아니라 제 욕심처럼 보일까 봐요.”
그녀는 한참 동안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날 기다렸어요.”
제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역 앞에서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도 됐어요. 그냥 마음이 있었다는 말이면 됐어요. 그러면 나도 덜 외롭게 떠났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5년 전의 제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당신은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만 했죠.”
“미안합니다.”
“많이 서운했어요.”
그 말에 저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뒤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미워지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오래 생각났나 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더는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 전에도 늦었고, 이번에 또 늦으면 정말 끝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이번에는 안 늦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이 저를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지윤 씨, 5년 전에도 좋아했고, 지금 다시 만나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니, 흔들린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아직도 지윤 씨를 좋아합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5년이나 지났는데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 손을 바라봤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5년 전 역 앞에서 놓쳐버린 손을, 이제야 다시 잡았다는 것을요.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잡고 있는 동안 천천히 따뜻해졌습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물러나지 않아도 되나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절대 안 물러날게요.”
그녀는 웃었습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그 웃음은 분명히 예전의 그녀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아주 오래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말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
5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손끝을 통해 천천히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뒤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뒤, 저는 다시 그녀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밥을 먹자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작은 꽃다발을 준비했고, 예전에 회사 근처에서 자주 걷던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5년 전 하지 못했던 말이 다시 목까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삼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늦고 싶지 않습니다. 지윤 씨, 저 다시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저를 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네요.”
저도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꽃다발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럼 나도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나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5년 동안 마음 한쪽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공원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손이 스치기만 해도 모른 척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녀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이상하게 처음 잡는 손 같지 않았습니다. 오래 돌아온 마음이 이제야 제자리에 앉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녀가 제 옆에서 말했습니다.
“우리 참 오래 걸렸네요.”
저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습니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번에는 안 놓치겠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제 손을 살짝 잡아주었습니다.
그 짧은 힘이 대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5년 늦게 다시 시작했습니다.

1년 뒤, 저는 다시 그 공원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했습니다
우리는 1년 동안 천천히 만났습니다.
5년 전 놓친 시간을 억지로 한꺼번에 채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주 천천히, 서로의 하루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피곤할 때 말수가 줄어드는 습관, 기분이 좋으면 걸음이 조금 빨라지는 버릇까지 다시 배웠습니다.
그녀도 저를 다시 알아갔습니다.
제가 아직도 중요한 일을 앞두면 손끝을 만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
말로는 괜찮다고 해도 표정에 티가 난다는 것.
그리고 5년 동안 가끔 그녀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는 것까지요.
그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날,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조용히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그 편지가 제가 놓친 마음 같아서요.”
그녀는 제 손을 조금 더 꼭 잡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번에는 늦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같이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반지 상자를 준비하고 다시 그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그녀를 다시 그 공원으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5년 만에 다시 시작하기로 했던 그 공원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꽃다발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반지 상자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걸어왔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저는 웃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티가 납니까?”
“너무 많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습니다.
그 웃음을 보는데 갑자기 5년 전 역 앞의 그녀가 떠올랐습니다.
상자 손잡이를 놓지 못했던 밤.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말밖에 못 했던 제 목소리.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다 한 번 뒤돌아보던 그녀의 얼굴.
그때 놓친 손을, 저는 이제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공원 벤치 앞에 섰습니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볼 옆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저를 봤습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낮췄습니다.
그녀의 눈이 커졌습니다.
“지윤 씨.”
제 목소리가 조금 떨렸습니다.
“저는 5년 전 당신을 놓쳤습니다. 좋아하면서도 말하지 못했고, 붙잡고 싶으면서도 겁이 나서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습니다.
저는 반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 뒤로는 매일 확신했습니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다고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저는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좋은 날만 같이 있고 싶은 게 아닙니다. 힘든 날에도 옆에 있고 싶습니다. 말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먼저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이 혼자 견디지 않게, 당신 곁에서 같이 걷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저도 목이 메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말만큼은 또렷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지윤 씨,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먼저 나왔고, 그다음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심스럽고 따뜻한 웃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늦지 않았네요.”
저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네. 결혼할게요.”
그 순간 저는 5년 전 역 앞에서 멈춰 있던 시간이 아주 천천히 다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손이 제 손 안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퇴사하던 그녀는 지금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드레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제게 물었습니다.
“그때 내가 커피 마시자고 했던 거 진짜 몰랐어요?”
저는 웃었습니다.
“몰랐다기보다… 겁이 났어요.”
“겁이 많은 사람인 줄은 알았어요.”
“그래도 이번엔 안 도망쳤잖아요.”
그러면 그녀는 꼭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좋아서 저는 또 웃었습니다.
결혼식 날, 그녀는 제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습니다.
처음에는 반지와 관련된 물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만년필이 들어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녀가 제 책상 위에 두고 갔던 만년필과 같은 브랜드의 새 펜이었습니다.
카드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래 같이 써요.”
저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5년 전 그녀가 남기고 간 만년필은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날 받은 이 만년필은 앞으로 함께 써 내려갈 시간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웃고 있었습니다.
입사 첫날 제게 자리를 내어주던 사람.
야근 끝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같이 서 있던 사람.
퇴사하던 날 제게 선물과 편지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
5년 뒤 다시 만나 제 고백을 받아준 사람.
그 사람이 이제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사람들 앞에서 많은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손끝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말하지 못한 채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시는 혼자 걷게 두지 않겠다고요.
그때 하지 못한 말은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아침이면 같이 커피를 마시고, 퇴근길에는 장을 보고, 주말이면 별일 없이 동네를 걷습니다.
가끔은 너무 평범한 순간이 오히려 벅찰 때가 있습니다.
5년 전에는 역 앞에서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던 사람이, 지금은 제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랑은 꼭 영화처럼 시작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 조심스러워서 시작되지 못합니다.
어떤 마음은 너무 늦게 말해서 한 번은 멀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야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됩니다.
저는 그녀를 한 번 놓쳤습니다.
입사 동기였고, 서로 마음이 있었고, 가까워질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퇴사하고 유학을 떠났을 때, 저는 그제야 제가 얼마나 겁이 많았는지 알았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5년 뒤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가끔 장난처럼 묻습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티를 냈는데 진짜 몰랐어요?”
그러면 저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면 아내는 웃습니다.
“그래도 이번엔 용기 냈잖아요.”
네.
이번에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때 퇴사하던 그녀는 지금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오래된 편지는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가끔 밤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5년 전 그녀가 남긴 편지를 다시 볼 때가 있습니다.
종이는 조금 낡았고, 접힌 자국도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 안의 문장은 아직도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사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혼자 웃습니다.
그때 그녀는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썼고, 저는 너무 늦게 그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말 같이 있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평범한 주말에도.
늦게 도착한 마음이었지만, 끝내 서로에게 닿았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늦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더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놓친 사랑이 모두 돌아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다시 마주친 마음 앞에서 한 번 더 솔직해질 수 있다면, 오래 미뤄둔 고백도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제게는 그 사람이 지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제 옆에서 웃고 있는, 제 아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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