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던 날 고백하지 못한 직장 동료, 5년 뒤 다시 만났습니다

평소 은근히 마음이 가던 그녀가 어느 날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회사에 나오던 사람이,
늘 밝게 인사하고,
회의 자료를 누구보다 꼼꼼하게 챙기던 사람이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니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괜히 천천히 걷고,
탕비실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리면 커피를 한 잔 더 타는 척했고,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게 제 하루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곧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번 못 해봤는데,
이제는 얼굴조차 보기 어려워진다니요.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의 부서에서는 마지막 송별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일을 하는 척했지만,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언젠가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언젠가를 계속 뒤로 미뤘습니다.

조금 더 친해지면,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사에서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확신이 생기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핑계들이 전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회사를 떠나면 복도에서 마주칠 일도, 탕비실에서 우연히 커피를 마실 일도,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 일도 없어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갑자기 제 마음을 꺼내면, 그것이 고백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말해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참아야 할까.

우리는 다른 팀이었지만 같은 날 입사한 동기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팀 직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날 입사한 동기였습니다.

입사 첫날 강당에서 나란히 앉았던 건 아니었지만, 신입 교육장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그때 알았습니다.

지윤.

처음에는 그저 같은 해에 들어온 동기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서가 달라서 매일 같이 일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층을 썼고, 복도에서 마주칠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바쁘시네요.”

“점심 드셨어요?”

“회의 들어가시나 봐요?”

그런 말을 늘 밝게 건넸습니다.

그러다 우리 둘이 제대로 가까워진 건 입사 2년 차 때 맡았던 협업 프로젝트 때문이었습니다.

협업 프로젝트를 하면서 가까워졌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두 부서가 함께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실무 자료를 정리했고, 그녀는 일정과 거래처 요청사항을 맞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업무 때문에 자주 메신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표는 이렇게 정리하는 게 더 보기 좋지 않을까요?”

“그럼 제가 발표 순서에 맞춰서 다시 배치해볼게요.”

그런 식의 말들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잘 통했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비슷했고, 중요하게 보는 부분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숫자와 근거를 먼저 봤고, 그녀는 그 자료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이 맞물렸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둘 다 동시에 한숨을 쉬고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오늘 진짜 정신없었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저도 웃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도요. 일하기 편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냥 다른 팀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같이 일하면 마음이 편한 사람.

괜히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힘든 회의가 끝난 뒤에도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야근하던 밤마다 그녀의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제가 야근하는 날이면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가 있었습니다.

“또 야근이에요?”

“네. 오늘은 보고서가 좀 늦어져서요.”

그러면 그녀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내일도 회사 와야 하잖아요.”

대단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그녀가 지나간 뒤에도 저는 한참 동안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제 회사 생활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서로 마음이 있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도 제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몰랐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회사라는 공간이 우리를 조심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내에서 괜히 소문이 나면 불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팀이었지만 프로젝트가 겹칠 때도 있었고, 회식 자리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그다음 날부터 같은 복도에서 어떻게 마주쳐야 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조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녀도 그랬습니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작게 물었습니다.

“오늘 점심은 누구랑 드세요?”

저는 순간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 말이 그냥 묻는 말인지, 같이 먹자는 뜻인지 헷갈렸습니다.

“아마 팀 사람들이랑 먹을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잠깐 웃었습니다.

“그렇구나.”

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때 제가 한 번만 더 용기를 냈으면 됐습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드실래요?”

그 말을 했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못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다가, 꼭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멈췄습니다.

마지막 회식이 끝날 때까지 음식점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 소식이 진짜라는 걸 확인한 건, 우연히 그녀의 부서 앞을 지나가던 오후였습니다.

복도 끝에서 그녀가 책상 위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작은 화분, 노트, 컵, 서류 몇 장.

그녀는 그걸 하나씩 종이 상자에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자리 정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책상 위가 너무 깨끗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그 부서 입구 근처에 있던 여자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지윤 씨… 자리 정리하시는 건가요?”

그 직원이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아, 모르셨어요? 지윤 씨 오늘까지예요. 회사 그만두세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요?”

“네. 오늘 저녁에 지윤 씨 송별회 겸 회식이 있어요. 부서 사람들끼리 마지막으로 밥 먹기로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뒤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메일을 열어놓고도 글자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서 퇴사를 준비하는 여자 직장 동료가 태블릿과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서 있고, 뒤쪽 남자 직장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
퇴사를 앞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만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오늘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번 못 해봤는데,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의 부서 사람들이 하나둘 회사를 나섰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 모습을 봤습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회사 근처 작은 음식점이었습니다.

저는 따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회식은 그녀의 부서 회식이었고, 저는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점 맞은편 길가에 서 있었습니다.

회식이 끝나고 그녀가 혼자 나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라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들어가지도 못할 회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 해서요.

문밖에서 그녀의 마지막 저녁을 지켜봤습니다

음식점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녀도 웃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가서 공부 잘하고 와요”, “우리 잊으면 안 됩니다”, “나중에 연락해요” 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저는 그 안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회사 저녁인데, 저는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녀의 부서 사람들은 음식점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습니다.

“잘 다녀와요.”

“몸 조심하고요.”

“연락 꼭 해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네.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방과 작은 짐을 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때 저는 더는 숨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습니다.

“어? 여기 계셨어요?”

저는 괜히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녀가 보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들고 있던 짐을 보고 말했습니다.

“짐이 무거워 보이네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웃었습니다.

“괜찮은데…”

“역까지라도요.”

그녀는 결국 작은 상자를 제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 근처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회식이 끝난 거리에는 음식점 간판 불빛이 아직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우리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짧은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역까지 걷는 길에 마지막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가 뭘요. 오히려 제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가 잠깐 웃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자리 안 계시더라고요.”

“네?”

“잠깐 들렀는데 없으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퇴사한다는 소식에 아무것도 못 하겠어서, 잠시 회사 밖으로 나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아…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책상에 작은 선물을 두고 가려고 했는데 안 계셔서요. 같은 팀 분께 부탁드렸어요.”

저는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선물이요?”

“네. 별건 아니에요. 그냥… 그동안 고마웠다는 뜻으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내일 출근하시면 꼭 열어보세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냥 고마움의 선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끝내 말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역 입구가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녀가 제게서 짐을 받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면 괜찮아요.”

저는 손을 놓지 못하고 잠깐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젠 못 보겠네요. 잘 계셔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사귀던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손을 잡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이별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가지 말라고 하면 너무 늦은 걸까요?”

“사실 저 지윤 씨 좋아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목까지 말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퇴사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까지 얹는 것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해외로 떠나 공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제 욕심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웃었습니다.

정말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잠깐 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잘 지내세요.”

그녀는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제 책상 위에는 작은 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저는 제 책상부터 봤습니다.

평소 같으면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을 텐데, 그날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말한 선물이 정말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 모니터 옆에는 작은 종이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꽃다발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팀원이 말했습니다.

“어제 옆 팀 지윤 씨가 두고 가셨어요. 꼭 전달해달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손끝이 조금 떨렸습니다.

종이봉투 안에는 작은 만년필 하나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 첫 줄을 보고 저는 한참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보고서 쓸 때마다 펜을 자주 빌리시던 게 생각나서요.”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제 책상 위에 두고 간 것이었습니다.

편지 속에는 놓쳤던 신호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는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커피 마시자고 했던 날, 사실은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야근 끝나고 같이 내려가자고 한 날도, 사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늘 제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가면, 당신은 예의 있게 한 걸음 물러났어요.”

“그래서 저도 더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것을요.

그녀도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놓쳤습니다.

아니, 어쩌면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릅니다.

겁이 많아서.

회사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사무실에서 남자 직장인이 퇴사한 여자 직장 동료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있으며 책상 위에 작은 선물 상자와 꽃다발이 놓여 있는 장면
그녀가 떠난 뒤 책상 위에 남겨진 작은 선물과 편지는,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을 뒤늦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연락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저는 그날 퇴근하자마자 그녀에게 연락했습니다.

메신저 프로필은 남아 있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도 저장되어 있었지만,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문자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웠습니다.

결국 보낸 문장은 짧았습니다.

“편지 봤어요. 고마워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한 번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답장은 다음 날 새벽에 왔습니다.

“죄송해요. 오늘 출국해요.”

그 한 줄을 보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떠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도 늦은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보냈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꼭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고마워요. 당신도 잘 지내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 회사는 예전과 같았지만, 제 하루는 달라졌습니다.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지 않게 됐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셔도 더 이상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준 만년필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가끔 보고서를 쓰다가 펜이 필요해지면, 그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편지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사실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5년 뒤, 전 회사 근처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저도 회사를 옮겼고, 일은 바빠졌고, 그녀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흐려졌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가끔 비슷한 향수 냄새가 나면 그녀가 생각났습니다.

누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점심 드셨어요?”라고 물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편지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 회사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습니다.

회의가 예상보다 일찍 끝났고, 저는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혹시… 맞죠?”

돌아보는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였습니다.

조금 더 차분해졌고,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지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먼저 웃었습니다.

저는 겨우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사실 그 순간, 5년이라는 시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퇴사하던 날의 회식 자리, 책상 위의 선물, 새벽에 온 출국 문자.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새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결혼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저 아직 혼자예요.”

저는 순간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그녀가 웃었습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저도 웃었습니다.

“저도 아직 혼자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저는 봤습니다.

그녀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을요.

그날 저는 5년 늦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일 이야기를 하고, 유학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웃을 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버릇은 그대로였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끝날 줄 알았던 만남은 저녁 식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늦은 밤, 우리는 조용한 술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의 편지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그때 편지 읽고 무슨 생각 했어요?”

저는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질문을 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 전에는 도망쳤습니다.

회사라는 핑계를 댔고, 타이밍이 아니라는 핑계를 댔고, 그녀의 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 뒤에 제 겁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후회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았습니다.

“많이요?”

“네. 많이요.”

저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도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멈추지 않았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가지 말라고는 못 해도, 좋아한다고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 했습니다. 부담이 될까 봐, 늦은 것 같아서, 괜히 당신 길을 붙잡는 것 같아서요.”

말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5년 동안 가슴 어딘가에 걸려 있던 문장이 드디어 밖으로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잔을 내려다봤습니다.

그리고 작게 웃었습니다.

“이번엔 알아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도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5년 전 회식 자리에서 봤던 그 웃음과 같았습니다.

조금 아쉽고, 조금 다정하고, 조금 늦은 웃음.

저는 그날 처음으로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좋아했고, 지금 다시 만나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녀는 잠시 저를 보다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물러나지 않아도 되나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안 물러날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며칠 뒤 공원에서 다시 고백했습니다

며칠 뒤, 저는 다시 그녀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밥을 먹자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작은 꽃다발을 준비했고, 예전에 회사 근처에서 자주 걷던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5년 전 하지 못했던 말이 다시 목까지 올라왔습니다.

저는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늦고 싶지 않습니다. 지윤 씨, 저 다시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저를 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네요.”

그 말에 저도 웃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5년 늦게 시작했습니다.

공원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하고, 여성은 감격한 듯 놀란 듯 바라보는 장면
5년 전 끝내 하지 못했던 고백은, 다시 만난 그날 공원에서 꽃과 함께 조심스럽게 전해졌습니다.

그때 퇴사하던 그녀는 지금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만났습니다.

5년 전처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들었고, 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다시 배웠습니다.

처음부터 연인처럼 뜨거웠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조심스러웠습니다.

한 번 놓쳤던 인연이라 더 조심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편했습니다.

오래된 사람인데 새로 만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고, 저는 예전보다 조금 덜 겁쟁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말마다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카페에서 만났고, 그다음에는 전시회를 갔고, 어느 날은 그녀가 좋아하는 작은 식당에 갔습니다.

그녀는 가끔 그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내가 커피 마시자고 했던 거 진짜 몰랐어요?”

“몰랐다기보다… 겁이 났어요.”

“겁이 많은 사람인 줄은 알았어요.”

“그래도 이번엔 안 도망쳤잖아요.”

그러면 그녀는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좋아서 저는 또 웃었습니다.

우리는 1년쯤 만났고, 결국 결혼했습니다.

결혼식 날, 그녀는 제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습니다.

그 안에는 5년 전 제 책상 위에 두고 갔던 만년필과 같은 브랜드의 새 펜이 들어 있었습니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래 같이 써요.”

저는 그 카드를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울 뻔했습니다.

퇴사하던 날 고백하지 못했던 그 사람.

책상 위에 선물과 편지를 남기고 떠났던 그 사람.

5년 뒤 다시 만나 제 고백을 받아준 그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제 아내입니다.

그때 하지 못한 말은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너무 많이 미뤘습니다.

다음에 말해야지.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해야지.

회사에서 괜히 불편해지면 안 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야지.

그렇게 하루를 미루고, 또 하루를 미루다가 결국 그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운 좋게 다시 만났지만, 사실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합니다.

그때 회식이 끝난 밤, 역 앞에서 한마디만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그녀의 유학을 붙잡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녀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 마음이 있었다는 것만은 말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무 일도 안 생긴 게 아니라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거였습니다.

저는 그걸 그녀가 떠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만났을 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가끔 묻습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진짜 몰랐어요?”

그러면 저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웃습니다.

“그래도 이번엔 늦지 않았네요.”

네.

이번엔 늦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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