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지에서 같은 호텔에 묵게 된 직장 동료, 그날 밤 선을 넘지 않아서 더 설렜습니다

요즘 저는 고백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그녀와 사귀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고백했다가 지금의 관계가 깨질까 봐 겁이 납니다.

그녀가 제가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저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의 메인 담당자였고, 회사에서도 일 잘하기로 인정받는 선배였습니다.

똑똑했고, 예뻤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회의실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정리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저는 아직 입사 3년 차였습니다.

일을 배워가는 중이었고, 중요한 회의에서는 아직도 메모를 놓칠까 봐 긴장하는 실무자였습니다.

나이도 그녀가 저보다 조금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종종 마주치면 그녀는 늘 상냥했습니다.

다른 부서인데도 복도에서 만나면 먼저 웃으며 인사했고, 가끔 제가 자료를 들고 허둥대고 있으면 “커피 한잔하고 가요”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괜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녀는 그냥 선배로서 친절하게 대해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절을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커진 건 어느 출장지의 밤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잡아준 숙소에 묵었던 그날, 저는 그녀를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그녀는 다른 부서의 메인 담당자였고, 저는 실무자로 따라간 사람이었습니다

그 출장은 우리 팀이 주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로젝트의 중심은 그녀가 있는 부서였습니다.

그녀는 거래처와의 일정, 발표 흐름, 핵심 자료를 모두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팀에서 필요한 수치와 실무 자료를 맞추기 위해 함께 가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녀가 앞에서 방향을 잡고, 저는 뒤에서 자료를 받쳐주는 역할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날 저는 그녀가 왜 회사에서 인정받는지 처음으로 제대로 봤습니다.

거래처 담당자가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괜히 웃으며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아직 회의 하나에도 긴장하는데, 그녀는 이미 그 자리의 흐름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쁜 사람이라기보다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한 뒤부터 이상하게 더 의식됐습니다.

출장지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아침 기차역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서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오피스룩이었지만, 그날은 어딘가 달라 보였습니다.

손에는 파일이 아니라 작은 커피가 들려 있었고, 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느슨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사실 저는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괜히 민망할 것 같았습니다.

기차 안에서는 대부분 업무 이야기만 했습니다.

거래처가 예민하게 보는 부분, 예상 질문, 발표 순서, 수정해야 할 표.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자료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먼저 설명할게요. 수치 질문이 나오면 그때 이어서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이 참 차분했습니다.

누군가를 믿고 따라가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자꾸 긴장했습니다.

일을 잘해야 한다는 긴장도 있었고, 그녀 앞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기차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자꾸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래처 미팅은 길었고, 비는 생각보다 세게 내렸습니다

출장지에 도착하자마자 거래처로 이동했습니다.

미팅은 예상보다 길었습니다.

상대 쪽에서 자료를 꼼꼼하게 물었고, 중간중간 일정 변경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담당자가 날카롭게 질문해도 차분하게 받아냈고, 제가 자료를 찾느라 잠깐 멈추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줬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다시 정리해서 오후 안에 공유드리겠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저는 옆에서 자료만 넘기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미팅은 그녀가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미팅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저녁 기차로 올라갈 예정이었지만, 폭우 때문에 일정이 꼬였습니다.

결국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에 하루 묵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거래처에 들렀다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숙소는 회사에서 이미 예약해둔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같은 호텔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회사 밖에서, 낯선 도시에서, 같은 호텔 로비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을 뿐입니다.

체크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녀가 작게 말했습니다.

“오늘 꽤 길었네요.”

“네. 그래도 선배님이 잘 정리해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녀가 웃었습니다.

“선배님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제가 너무 오래된 사람 같네요.”

저는 괜히 당황했습니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웃었습니다.

“알아요. 농담이에요.”

그 짧은 농담 하나에도 저는 괜히 마음이 풀렸습니다.

비 오는 출장지 고급 호텔 로비에서 남자 직장인과 세련된 연상 여자 선배가 캐리어를 끌고 함께 들어오는 장면
비가 내리던 출장지 호텔 로비에서, 그는 회사 밖의 낯선 분위기 속에 그녀를 예전과는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밤 산책을 나왔다가 호텔 앞에서 다시 마주쳤습니다

방에 짐을 풀고 씻고 나니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낯선 도시라서 그런지, 긴 미팅이 끝난 뒤라서 그런지, 그냥 바로 잠들기에는 아쉬웠습니다.

저는 호텔 근처를 조금 걸을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고, 길바닥에는 가로등 불빛이 젖어 있었습니다.

호텔 정문 앞에서 그녀를 다시 본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녀도 가볍게 외투를 걸치고 서 있었습니다.

“어디 가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녀가 조금 놀라더니 웃었습니다.

“그냥요. 바로 자려니까 좀 아쉬워서요.”

그 말이 이상하게 반가웠습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요.

호텔 맞은편 골목에는 작은 호프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간판 불빛이 조용히 켜져 있었고, 창가 자리 몇 개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먼저 그쪽을 보고 말했습니다.

“맥주 한잔 정도는 괜찮겠죠?”

저는 잠깐 망설였습니다.

다른 부서 선배와 출장지에서 밤에 술을 마신다는 게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웃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우시면 괜찮아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제가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한잔만 하시죠. 오늘 고생도 많으셨고요.”

그렇게 우리는 호텔 맞은편 작은 호프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술이 들어가자 그녀는 오래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호프집은 조용했습니다.

출장지의 평일 밤이라 그런지 손님도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맥주 두 잔이 놓였고, 빗물이 마른 창밖으로 호텔 불빛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업무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래처 반응, 오늘 미팅에서 아쉬웠던 부분, 내일 아침 보고할 내용.

그러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생각보다 웃음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단정하고 차분해서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저 회사에서 그렇게 딱딱해 보여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조금요.”

그녀가 웃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알아요.”

그 말투가 이상하게 편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그녀가 회사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사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다른 부서의 메인 담당자.

실수하면 안 되는 사람.

회의에서 흔들리면 안 되는 사람.

그녀는 늘 그렇게 서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밤, 낯선 출장지의 작은 호프집에서 그녀는 조금 풀려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생각보다 술이 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맥주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녀가 손등으로 볼을 살짝 누르며 웃었습니다.

“괜찮아요. 저 원래 술 잘 못 마셔요.”

“그럼 더 마시지 마세요.”

“네. 한 잔이면 충분해요.”

그런데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저 예전에 결혼할 뻔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녀가 처음 꺼낸 오래된 상처

저는 맥주잔을 잡은 손이 잠깐 멈췄습니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말했습니다.

“오래 만났는데, 결국 잘 안 됐어요. 그때는 정말 끝까지 갈 줄 알았거든요.”

그 말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때문에 더 아프게 들렸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을 잊으려고 일을 더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아침에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회의 자료를 몇 번씩 다시 보고, 거래처가 묻기 전에 먼저 답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회사에서는 어느새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불리게 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맥주병을 손끝으로 천천히 굴리며 작게 말했습니다.

“다들 저보고 잘 산다고 해요.”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이 밝지는 않았습니다.

“일 잘하고, 독하고,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 같다고요.”

잠깐 말이 끊겼습니다.

창밖에는 비에 젖은 간판 불빛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근데 사실은요. 저는 별로 괜찮았던 적이 없었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 너무 가벼울 것 같았고, 위로하려고 하면 그녀가 더 민망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들었습니다.

그녀가 그동안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말을 실컷 꺼낼 수 있도록, 맥주병만 조용히 내려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웃는 듯하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손등으로 급히 눈가를 닦으면서도 그녀는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그 말이 더 아팠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람은 늘 흐트러지지 않아서 강한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고 너무 오래 버텨서 강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선배였고, 그날 출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었고, 저는 아직 입사 3년 차의 후배였습니다.

그 마음을 핑계로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측은했습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왜 혼자 이렇게 오래 아팠을까.

왜 회사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버텼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측은한 마음이 어느 순간 다른 감정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가엾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더 알고 싶었습니다.

위로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곁에 있고 싶어졌습니다.

그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저도 놀랐습니다.

비 오는 출장지 호프집 창가 자리에서 연상 여자 선배가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하고 남자 후배가 조용히 듣는 장면
술기운을 빌려 꺼낸 그녀의 오래된 상처는, 그를 이상하게 더 오래 흔들었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그녀를 부축해야 했습니다

호프집을 나왔을 때 밤공기가 차가웠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길은 아직 젖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살짝 휘청했습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작게 웃었습니다.

“죄송해요. 저 진짜 술 약하죠.”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호텔은 길 하나만 건너면 됐습니다.

하지만 젖은 길이라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한 번 더 휘청했을 때, 저는 조심스럽게 팔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습니다.

그녀의 어깨가 제 팔에 살짝 닿았습니다.

머리카락에서 비 냄새와 샴푸 냄새가 섞여 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낯선 도시의 밤이었고, 우리는 회사에서 잡아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그녀는 술에 약간 취해 있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 저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거의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과, 지금 무언가를 해도 된다는 생각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술에 약했고, 낯선 출장지에 있었고, 저는 그 순간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착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지금 편하게 기대는 건 저를 좋아해서가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냥 술기운 때문일 수 있었습니다.

길이 미끄러워서일 수도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옆에 있는 회사 사람이 저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걸 제 마음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습니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팔만 가볍게 받쳤고, 말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 말만 했습니다.

호텔방 앞에서 저는 멈췄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습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저는 숫자가 올라가는 표시만 보고 있었습니다.

괜히 그녀 쪽을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8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방이 있는 층이었습니다.

문이 열렸고, 저는 그녀를 천천히 복도 쪽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려다 한 번 떨어뜨렸습니다.

제가 주워서 건넸습니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고마워요.”

방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녀가 카드키를 문에 댔고, 초록 불이 켜졌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 순간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돌아봤습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목소리는 작았습니다.

저는 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들어가서 바로 쉬세요. 물은 꼭 드시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내일 봬요.”

저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문 앞에서 멈췄습니다.

그녀가 문을 닫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섰습니다.

문 앞에서 흔들렸지만 물러섰습니다

솔직히 그 짧은 복도에서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녀가 제 팔에 기대는 순간마다 심장이 크게 뛰었습니다.

방 안의 따뜻한 조명, 조용한 복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밤.

조금만 더 다가가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정말 아주 짧은 순간, 이상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녀를 더 붙잡고 싶다는 생각.

지금 이 시간을 조금만 더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바로 그다음,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녀는 술에 약해진 상태였고, 저는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기대를 제 마음대로 로맨스로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장지였고, 밤이었고, 같은 호텔 복도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날 제가 방 안으로 한 발이라도 들어갔다면, 그 기억은 설렘이 아니라 후회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호텔 복도를 걸어 제 방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물 한 병을 들고 다시 나갈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멈췄습니다.

괜히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문 앞에 조용히 두고 오는 것도 잠깐 생각했지만, 그것도 망설여졌습니다.

그녀가 다음 날 그걸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프런트에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숙취 해소 음료 하나와 작은 쪽지를 봉투에 넣었습니다.

쪽지에는 딱 한 줄만 적었습니다.

“팀장님, 우리 내일 프로젝트 열심히 해요. 파이팅.”

그 이상은 쓰지 않았습니다.

고맙다거나, 걱정된다거나, 오늘 좋았다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제 마음이 너무 많이 묻어날 것 같았습니다.

저는 프런트에 봉투를 맡기며 말했습니다.

“8층 객실에 아침에 전달 부탁드립니다. 동료가 내일 미팅이 있어서요.”

그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장지 호텔 복도에서 남자 후배가 술에 취한 연상 여자 선배를 방 앞까지 부축해 데려다주고 문 앞에서 멈춰 서 있는 장면
호텔방 문 앞에서 그는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녀가 편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거리를 먼저 선택했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로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전날보다 조금 민망한 얼굴이었습니다.

“어제 제가 실수한 건 없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없었습니다. 그냥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아요.”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술을 괜히 마셨나 봐요. 제가 생각보다 약해서요.”

“한 잔도 안 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가 웃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빨리 올라올 줄 몰랐어요.”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어제 데려다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불편하지 않게 해주셔서요.”

그리고 그녀가 가방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보였습니다.

“이거… 프런트에서 받았어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녀는 쪽지를 다시 접으며 작게 웃었습니다.

“덕분에 아침에 조금 정신 차렸어요. 파이팅이라는 말도요.”

그 말에 저는 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오늘 미팅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녀는 잠깐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챙겨주셔서 고마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어제 제가 멈춘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텔을 나서 거래처로 다시 향하는 순간,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호프집 창가에서 “늘 혼자였다”고 말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택시 안에서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바로 자료를 확인했습니다.

“어제 수정 요청받은 부분, 3페이지 표만 다시 정리하면 될 것 같아요.”

목소리는 다시 단정했습니다.

거래처 회의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어제보다 더 집중했습니다.

피곤해 보였지만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바로 대답했고, 일정 조율도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뭐든 다 갖춘 커리어우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날 밤의 그녀를 봐버렸습니다.

그래서 알 것 같았습니다.

그 단단함 뒤에 얼마나 오래된 외로움이 숨어 있는지요.

그날부터 그녀가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회사로 돌아온 뒤, 그녀는 여전히 상냥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다시 회사의 속도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다른 부서로 돌아갔고, 저는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회의에서 마주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였기 때문에 볼 일이 없으면 며칠씩 얼굴을 못 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엘리베이터 앞이나 구내식당 근처에서 마주치면 그녀는 늘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요즘 바쁘죠?”

그녀가 먼저 물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괜히 그녀 부서가 있는 층에서 커피를 뽑았습니다.

정말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혹시 복도 끝에서라도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회의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자,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종이컵만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고 먼저 웃었습니다.

“어, 여기까지 오셨어요?”

저는 괜히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 커피가 여기 게 좀 나은 것 같아서요.”

말하고 나서 스스로도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지나갔고, 저는 그날 커피 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제가 자료를 들고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거 지난번 거래처 자료랑 연결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잠깐 자료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커피 한잔하면서 볼까요? 지금 10분 정도는 괜찮아요.”

그렇게 우리는 사내 카페에 잠깐 앉았습니다.

그녀는 제 자료에서 빠진 부분을 짚어줬고, 저는 정신없이 메모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결론으로 가면 거래처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요. 중간에 근거 하나 더 넣는 게 좋아요.”

역시 그녀는 달랐습니다.

짧게 봐도 핵심을 잡았습니다.

커피는 그녀가 샀습니다.

“출장 때 도움받은 것도 있고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고맙다고 했지만, 마음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녀가 상냥할수록 좋았습니다.

그런데 좋을수록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녀가 내게 잘해주는 것이 호감인지, 선배로서의 배려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로 돌아온 뒤 시작된 가슴앓이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저는 그녀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녀가 서 있으면, 아무 말도 하기 전에 먼저 심장이 반응했습니다.

구내식당 입구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면 밥맛이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저를 볼 때마다 늘 환하게 웃어줬습니다.

“요즘 바쁘죠?”

“지난번 자료는 잘 정리됐어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줬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더 흔들렸습니다.

그녀의 미소가 선배로서의 친절인지, 그날 출장 이후 조금 달라진 마음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

점심도 같이 먹고 싶었고, 퇴근길에 커피라도 한잔하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힘들어 보이는 날에는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있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부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 주변에는 늘 팀장님, 부장님, 거래처 담당자,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 근처에 쉽게 끼어들 수 없는 입사 3년 차 직원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녀는 늘 너무 멋있었습니다.

회의 자료를 들고 복도를 걷는 모습도, 누군가의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 모습도, 커피를 들고 잠깐 웃는 모습도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커졌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스스로도 민망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가 아직 누구의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지금처럼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못난 생각.

그런 생각이 드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말하지 못했습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제 마음이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혹시 내가 그날 밤의 일을 혼자 다른 의미로 키운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혹시 지금의 편한 관계마저 깨지면 어떡하지.

그 생각 때문에 저는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하루는 혼자 방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작게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고 나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없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 앞에서는 그 말의 첫 글자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꼭 묻습니다.

“그래서 둘이 사귀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 바로 사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회사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였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실무자였습니다.

그 차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닙니다.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녀는 가끔 제게 먼저 말을 걸었고, 저는 그녀 앞에서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그녀가 먼저 웃었습니다.

자료를 봐준 날에는 “이번 건 잘 정리됐네요”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정도가 좋았습니다.

사귀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날 밤 제가 그녀의 취약한 순간을 제 감정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날에도,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서로를 피하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게 진짜 시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출장지의 설렘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날 이후 저는 출장이라는 게 사람 마음을 참 이상하게 만든다는 걸 알았습니다.

낯선 도시,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 밤의 술자리, 조용한 복도.

회사에서는 아무렇지 않던 마음도, 그런 밤에는 괜히 한 걸음 먼저 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오면 우리는 다시 회사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밤의 설렘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가 다음 날 나를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그날 제가 조금 더 다가갔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 기억은 설렘이 아니라 부담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다음 날 로비에서 저를 피했을지도 모릅니다.

회사로 돌아온 뒤, 복도에서 마주쳐도 예전처럼 웃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멈췄고, 그래서 우리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밤을 떠올립니다.

호텔 복도 끝에서 문이 닫히던 소리, 손에 쥐고 있던 숙취 음료, 쪽지에 적었던 짧은 문장.

그때 제가 한 일은 대단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 걸음 물러선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걸음이 우리 사이를 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뒤로 그녀를 더 오래, 더 조심스럽게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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