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 미팅이 끝나고 나오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저는 우산도 없이 회사 로고가 찍힌 서류 봉투만 품에 안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 기획팀 지윤 씨가 제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습니다.
“같이 쓰고 가요. 자료 젖으면 곤란하잖아요.”
그 말이 친절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그날 이후 너무 빨리 마음을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저는 우산 아래에서 함께 걸었던 몇 분을 혼자 너무 크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우리 부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층, 다른 팀.
평소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게 전부였습니다.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획팀 지윤 씨.
그 정도였습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가는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팀장님이 말했습니다.
“이번 거래처 미팅, 기획팀 자료도 같이 들고 가야 하니까 지윤 씨랑 같이 다녀와요.”
그때만 해도 저는 몰랐습니다.
회사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겁이 납니다. 마음은 자꾸 앞으로 가는데, 그 마음이 들키는 순간 회사 생활까지 어색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날 하루가 제 마음을 그렇게 오래 흔들어놓을 줄은요.
거래처에 함께 가던 날, 마음이 이상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회사 로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밝은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 단정한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 본 순간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키도 컸고, 걸음도 조용했고, 손에는 파일철을 꼭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오래 남은 건 얼굴보다 말투였습니다.
택시를 타고 거래처로 가는 동안 그녀는 자료를 다시 넘겨보며 말했습니다.
“상대 팀장이 숫자를 많이 물어본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은 제가 바로 찾아드릴게요.”
저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녀는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편했습니다.
미팅이 시작되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제가 잠깐 수치를 찾지 못했을 때, 그녀가 옆에서 조용히 자료를 밀어줬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제 우산은 회사에 두고 왔고, 그녀에게만 작은 우산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역까지는 같이 쓰고 가셔도 돼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괜히 대답이 늦어졌습니다.
“아… 괜찮을까요?”
“네. 어차피 같은 방향이잖아요.”
우리는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역까지 걸었습니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우산을 제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고, 저는 혹시 그녀가 비를 맞을까 봐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습니다.
역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때, 제가 괜히 말을 꺼냈습니다.
“지윤 씨는 남자친구 있으세요?”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습니다.
너무 사적인 질문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잠깐 웃더니 가볍게 말했습니다.
“아직 없어요. 혹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농담처럼 지나간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곧바로 다시 거래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혼자 오래 붙잡았습니다.
아직 없다는 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
그날 밤부터 그 말이 제 마음속에서 자꾸 다른 뜻으로 커졌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다시 업무 이야기로 돌아갔습니다.
거래처 반응, 다음 보고 일정, 회사에 돌아가면 정리해야 할 자료.
대화는 금방 평범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짧은 농담 하나를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회사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저는 자꾸 그녀 쪽을 보게 됐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는 옆모습, 젖은 머리 끝을 손으로 정리하던 모습, 파일을 다시 확인하던 차분한 표정.
그날 이후 제 마음은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부서 앞을 괜히 지나가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기획팀에 전달할 자료가 있었고, 제가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냥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사 하나에 하루가 괜히 좋아졌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기획팀에 갈 일이 생기면 제가 먼저 나섰습니다.
“제가 갖다 드릴게요.”
원래라면 메신저로 보내도 되는 자료를 굳이 출력해서 들고 갔습니다.
다른 동료가 “내가 가는 김에 줄게”라고 해도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바로 다녀올게요.”
갈 때마다 커피를 들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팀 전체 커피였습니다.
“지난번 거래처 자료 도와주셔서요.”
그렇게 말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처음엔 웃으며 받았습니다.
“매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저는 그 말을 좋게만 들었습니다.
부담스럽다는 뜻일 수도 있는데, 그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자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싫은 건 아닌가 보다.’
그때의 저는 듣고 싶은 쪽으로만 들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녀가 웃으면 관심이라고 생각했고, 대답이 짧으면 바빠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자리에 없으면 괜히 아쉬웠고, 그녀가 다른 남자 직원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으면 이유 없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였습니다. 제가 그녀를 보러 가면서도, 스스로는 업무라고 둘러대기 시작한 게요.
커피를 거절당한 날, 처음으로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느 오후였습니다.
그날도 저는 손에 커피를 들고 기획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업무는 핑계였습니다.
그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고, 저는 커피를 내밀었습니다.
“마시면서 하세요.”
그녀는 잠깐 커피를 봤습니다.
그리고 저를 봤습니다.
웃기는 했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 오늘은 이미 마셨어요. 마음만 받을게요.”
아주 부드러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절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저는 억지로 웃었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요.”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습니다.
다음에요.
그 말마저 부담스럽게 들렸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커피를 들고 복도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 행동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그녀에게는 불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날 밤, 저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말이 계속 귀에 남았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싫다는 뜻이었을까.
부담스럽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이미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걸까.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휴대폰을 몇 번이나 켰다 껐습니다.
그녀의 메신저 프로필을 열었다가 닫았습니다.
기획팀 단체방에서 그녀 이름을 괜히 한 번 더 찾아봤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오늘 혹시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보내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 문장조차 제 마음을 들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회사 사람에게 마음이 생기면 가장 힘든 건,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친구에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동료에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괜히 누군가에게 말했다가 소문이 날 수도 있습니다.
말이 돌고 돌아 그녀 귀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지윤 씨 좋아한대.”
그 한마디가 회사 안에서 돌기 시작하면, 그녀가 얼마나 불편해질지 생각만 해도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좋아했고, 혼자 기대했고, 혼자 민망했고, 혼자 밤을 새웠습니다.
술을 마셔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는 퇴근하고 혼자 술을 마셨습니다.
누구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괜히 술자리에서 그녀 이야기를 꺼냈다가 제 표정이 먼저 들킬 것 같았습니다.
회사 근처 작은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맥주 한 잔이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잔을 마셔도, 두 잔을 마셔도 생각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거래처에서 자료를 넘겨주던 손.
비 오는 길에 우산을 제 쪽으로 기울여주던 모습.
커피를 거절하면서 미안한 듯 웃던 표정.
그 장면들이 술기운을 타고 더 크게 떠올랐습니다.
그때 처음 인정했습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게 됐구나.
인정하고 나니 더 힘들었습니다.
좋아한다는 걸 알아버리니까, 가만히 있는 게 더 어려웠습니다.
이대로 아무 말도 못 하면 놓칠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다가가면 어떡하지.
그녀가 나를 그냥 업무상 아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혼자만 좋아하다가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계속 올라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용기라기보다 불안에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좋아서라기보다, 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답을 받아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냥 제 마음이 진심이니까, 빨리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너무 빨리 고백했습니다
고백은 계획한 것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설픈 순간에 나왔습니다.
그날도 업무 때문에 기획팀에 들렀습니다.
정말 업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회사 휴게실 앞에서 그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자판기 옆 작은 테이블에 서서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휴게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커피머신 소리만 작게 들렸고, 유리벽 너머로 회의실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며칠 동안 눌러두었던 말이 목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냥 지나갔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나중에 더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윤 씨, 잠깐 이야기 가능하세요?”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로 저를 봤습니다.
“네? 지금요?”
그 짧은 대답에서 이미 망설임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멈추지 못했습니다.
회사 휴게실 한쪽, 커피머신 옆 작은 공간.
사람들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말해버렸습니다.
“저… 지윤 씨.”
말이 한 번 막혔습니다.
준비한 말은 분명 있었는데, 막상 그녀 앞에 서니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습니다.
“저, 지윤 씨 좋아합니다.”
그 말을 꺼내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못했습니다.
“거래처 다녀온 그날부터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는데… 저는 지윤 씨를 조금 더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습니다.”
말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너무 빨랐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제 감정만 앞세운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잠깐 눈을 내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더 꼭 잡았습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녀가 싫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그녀에게 설렘보다 부담에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아직 누군가를 새로 만날 마음이 없어요.”
그 말은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차갑게 밀어낸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하는 말투였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하지만 그 차분함이 더 아팠습니다.
저에게는 며칠 밤을 새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갑자기 휴게실에서 받은 고백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커진 감정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진심이어도 타이밍이 빠르면 부담이 된다는 걸
저는 길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네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조금 풀렸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더 이상했습니다.
제 안에서는 무언가 크게 무너졌는데, 회사 안은 너무 평소 같았습니다.
그날 오후 저는 일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메일을 열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보고서를 보면서도 그녀의 표정만 생각났습니다.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말했을까.
왜 조금 더 기다리지 못했을까.
왜 그녀가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지 먼저 보지 않았을까.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날 알았습니다. 위험했던 건 그녀를 좋아하게 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키운 마음을 상대도 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문제는 마음이 생긴 것보다 그 마음을 너무 빨리 확신한 데 있었습니다. 상대의 행동이 정말 호감인지 아직 헷갈린다면, 고백하기 전에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를 먼저 확인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착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백한 다음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봤습니다.
저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저를 본 순간 잠깐 멈췄다가,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싫어서 도망친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어색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며칠 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녀를 알아봤습니다.
그녀도 저를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바로 옆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회의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손에 든 파일이 조금 급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고백한 뒤로 그녀는 저를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그녀는 먼저 길을 바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일부러 그녀 쪽으로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사실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고, 그녀는 저 멀리 탕비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거리로 치면 열 걸음도 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저를 알아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마치 방금 생각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반대쪽 복도로 걸어갔습니다.
그때는 정말 숨이 막혔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그 정도로 불편한 사람이 됐구나.
그 생각이 들자 더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획팀 근처 복도에서 제 발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들었다가, 저라는 걸 확인하고 다시 모니터만 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게 저를 미워해서라기보다, 불편해서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미안했습니다.
저는 제 마음을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는 회사 안에서 피해야 할 사람이 하나 생긴 셈이었습니다.
나중에야 그 말이 제게 한 신호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며칠 뒤, 우연히 기획팀 직원들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누가 일부러 제게 말해준 건 아니었습니다.
점심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다가, 기획팀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스치듯 듣게 됐습니다.
지윤 씨에게 오래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귀던 사람이 유학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헤어진 건지 아닌지 애매한 시간이 꽤 길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며칠 전 우산 아래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없어요. 혹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그 말은 제게 보낸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색하지 않게 넘기려는 농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대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말을 제 마음대로 붙잡았습니다.
그녀에게 아직 누군가의 자리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저는 제 마음이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빨리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제가 기다릴 줄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는 걸요.
직장 동료에게 마음이 생겼을 때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신호
지금 돌아보면, 제가 너무 빨리 고백하게 된 데에는 이미 여러 신호가 있었습니다.
업무보다 그녀를 보는 일이 먼저가 됐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일을 만들어 그녀 부서에 갔습니다.
감사 인사를 핑계로 커피를 반복해서 들고 갔습니다.
상대가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제 마음대로 좋게 해석했습니다.
상대의 표정보다 제 설렘을 먼저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신호는 따로 있었습니다.
혼자 불안해졌다는 것.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받고 싶어졌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저는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고백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에게는 며칠 동안 참고 참다 꺼낸 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쉬는 시간에 갑자기 건네진 무거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준비도 없이 제 표정을 보고, 제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대답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게 뒤늦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퇴근하면 끝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마주쳐야 하고, 같은 건물에서 일해야 하고, 업무 메시지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아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진심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준비도 안 된 자리에서 제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휴게실 문이 열릴까 봐 신경 쓰였을 수도 있고, 누가 들을까 봐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마음만 보느라 그런 것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기획팀에 일부러 가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갈 일이 있어도 제가 먼저 나서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제가 다녀올게요” 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료는 메신저로 보냈고, 확인이 필요하면 통화로 끝냈습니다.
처음 며칠은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기획팀 층에서 멈추면 저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습니다.
복도 끝에서 비슷한 뒷모습만 보여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녀가 편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때도 그녀가 좋았습니다.
그녀의 말투가 생각났고, 거래처에서 침착하게 자료를 넘기던 모습이 생각났고,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자고 말하던 목소리가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 곁으로 계속 가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나를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것.
그게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늦은 배려였습니다.
다시 마주친 건 일주일 뒤였습니다
일주일쯤 지나고, 구내식당 앞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먼저 저를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습니다.
“요즘 바쁘신가 봐요.”
그 말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길게 대화를 이어갔을 겁니다.
“아니요, 그냥 뭐… 기획팀 갈 일이 없어서요.”
이렇게 말하고 웃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네, 이번 주는 조금 바빴어요. 지난번 자료는 덕분에 잘 정리됐습니다.”
그녀가 웃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짧은 대화가 좋았습니다.
억지로 붙잡지 않았고, 괜히 농담을 늘리지 않았고, 다음 약속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편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그 사람이 편하게 지나가도록 비켜주는 일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는 걸요.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그녀를 덜 좋아하게 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좋아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그녀를 보면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그녀가 편하게 웃는지 먼저 보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그녀와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끝나면 그대로 보내줄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는지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 변화가 조금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늦게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계속 기획팀 앞을 서성이고, 커피를 들고 가고,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려 했다면 아마 우리는 더 어색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그녀는 저를 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상처받았을 겁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왜 몰라주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진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속도의 문제였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에도 속도가 있다는 걸
직장 동료에게 마음이 생기면 누구나 흔들립니다.
자꾸 보고 싶고, 말을 걸고 싶고, 작은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가 멈춰야 했던 순간은 분명했습니다.
그녀가 있는 부서에 갈 일을 일부러 만들기 시작했을 때.
커피를 건네면서도 사실은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을 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라는 농담을 혼자 신호처럼 붙잡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거절했는데도, 제 마음이 진심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빨리 답을 듣고 싶어졌을 때.
그때 한 번 멈췄어야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끔 그날을 떠올립니다.
거래처에서 돌아오던 비 오는 길.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역까지 걸어가던 짧은 시간.
그때는 그 장면이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진짜 시작은 그 뒤였습니다.
휴게실에서 너무 빨리 고백하고, 그녀의 조심스러운 표정을 본 순간.
그때 저는 처음으로 제 마음만 보던 사람에서, 그녀의 마음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직장 로맨스는 고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가 불편해지기 전에 한 걸음 멈추는 것.
그날 이후 저는 알았습니다. 어떤 마음은 다가가서 커지는 게 아니라, 멈춰서 지켜낼 때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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