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실수를 조용히 수습해준 팀장님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회사 중역들까지 앉아 있던 대회의실에서, 제 발표 자료의 숫자 하나가 틀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올해로 입사 5년 차 대리입니다.

회사 생활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 능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중역들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는 여전히 긴장됐습니다.

저희 부서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팀장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말수가 많지 않은데도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이 잘 어울렸고, 회의실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공기가 조금 정돈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회사 여사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누가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탕비실에서 그 이름이 나오면 괜히 웃음이 섞였고, 회식 자리에서는 “팀장님은 왜 아직도 연애를 안 하실까” 같은 말이 가볍게 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팀장님은 그런 시선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여자 직원들에게 특별히 다정하게 굴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여지를 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습니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의는 있지만,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지는 않는 사람.

저도 모르게 그런 팀장님을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티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대리였고, 그는 팀장님이었습니다. 회사에서 그런 마음을 들키는 순간, 일도 사람도 모두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중역들 앞에서 자료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그날 대회의실 화면에는 몇 달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 발표 자료가 떠 있었습니다.

팀장님과 부장님뿐 아니라, 평소 회의에서 쉽게 마주칠 일 없는 회사 중역들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표 하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표 안에 들어간 숫자 하나가 틀려 있었습니다.

전날 밤 늦게까지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최종 파일이 아니라 그 전 버전의 자료를 기준으로 계산한 숫자였습니다.

발표가 중반쯤 지났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부장님이 화면을 보다가 말을 멈췄습니다.

“이 숫자, 지난주 자료랑 다른데요?”

그 순간 제 손끝이 차가워졌습니다.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목 안쪽이 바짝 말랐습니다.

대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화를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조용해서 더 힘들었습니다.

잘못된 숫자 하나가 대회의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것처럼 크게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을 했지만, 이미 제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습니다.

그때 제 오른쪽에 앉아 있던 팀장님이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어제 받은 파일 기준으로 함께 확인해보겠습니다. 발표 흐름은 이어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회의실 공기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팀장님은 저를 대신해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고 가볍게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제 실수가 사람들 앞에 더 오래 놓여 있지 않도록, 회의의 방향을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고맙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고, 이상하게 가슴이 뛰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은근히 신경 쓰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라서 눈에 들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가 가장 작아진 순간에, 저를 더 작아지지 않게 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내 실수가 모두 앞에 놓인 순간

실수를 확인한 뒤부터는 회의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팀장님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고, 동료들은 다시 노트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아직 그 숫자 하나 앞에 멈춰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제가 만든 보고서였는데, 그 순간부터는 제 실수를 증명하는 화면처럼 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수록 더 창피했습니다.

차라리 누가 한마디 해줬다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용한 배려와 조용한 침묵 사이에서, 저 혼자 계속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팀장님이 저를 보지 않았던 게 기억납니다.

일부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제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자료를 넘기고, 회의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말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괜찮다는 표정으로 저를 봤다면, 저는 더 창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제가 민망해할 틈까지 조용히 가려준 사람이었습니다.

실수를 조용히 도와준 행동이 단순한 친절인지 특별한 관심인지 헷갈린다면, 한 번의 도움만 보지 말고 직장 동료 호감 신호 15가지를 함께 보면서 전체 흐름을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회사 중역들이 지켜보는 회의실에서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착용한 여성 직장인이 프로젝트 발표 중 당황해 있고, 남자 동료가 옆에서 차분하게 설명하며 도와주는 장면
중역들 앞에서 자료 실수가 드러난 순간, 그는 당황한 나를 대신해 차분하게 발표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나를 더 민망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나갔습니다.

저는 괜히 천천히 노트북을 닫았습니다.

파일을 저장하는 척했고, 마우스를 정리하는 척했고, 이미 정리한 펜을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사실은 그냥 바로 나가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때 팀장님이 회의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저는 먼저 말했습니다.

“아까… 정말 감사했습니다.”

팀장님은 가볍게 웃었습니다.

“감사할 일 아니에요. 저도 그 파일 같이 봤잖아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팀장님이 헷갈렸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늘 자료를 꼼꼼하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의 전에도 자기 파일은 몇 번씩 확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줬습니다.

제가 혼자 틀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 순간 저는 이상하게 말을 잃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네, 감사합니다” 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키가 큰 팀장님이 회의실 문 옆에 서 있었고, 저는 노트북을 끌어안은 채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와의 거리는 분명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팀장님이라는 자리 때문인지, 제가 혼자 숨기고 있던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오후에 같이 보면 금방 잡힐 거예요. 너무 혼자 안고 있지 마요.”

그 말투가 이상하게 다정했습니다.

큰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 마음에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사람이 꼭 고백 같은 말에만 흔들리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가장 민망한 순간, 나를 더 민망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했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마음은 꼭 화려한 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가끔은 나를 덜 초라하게 만들어주는 말 한마디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점심시간 내내 팀장님이 신경 쓰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저도 같이 내려갔지만, 밥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동료들이 주말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새로 생긴 카페에 갔다고 했고, 누가 영화가 별로였다고 했습니다.

저도 가끔 웃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계속 회의실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숫자.

부장님의 질문.

짧은 침묵.

그리고 팀장님의 목소리.

저는 숟가락을 들다가 문득 팀장님 쪽을 봤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팀장님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까.

그때 눈이 마주칠 뻔했습니다.

저는 급하게 국그릇 쪽으로 시선을 내렸습니다.

스스로도 웃겼습니다.

아까까지는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었는데, 이제는 팀장님과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못 들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메신저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팀장님이었습니다.

“오후 공유 전에 파일 같이 볼까요?”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한 번 툭 내려앉았습니다.

그냥 업무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이상하게 굳었습니다.

한참 뒤에야 답했습니다.

“네. 제가 먼저 정리해둘게요.”

잠시 뒤 답장이 왔습니다.

“천천히 해요. 급하게 하면 더 헷갈려요.”

그 문장을 보고, 저는 모니터 앞에서 아주 작게 웃었습니다.

누가 보면 그냥 업무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그 문장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 여성 직장 동료가 자료를 들고 서 있고, 남성 직장 동료가 옆에서 조용히 자료를 함께 확인해주는 장면
그는 내 자리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자료를 봐줬지만, 나는 그 가까운 거리마저 괜히 신경 쓰였다.

팀장님이 옆에 서자 이상하게 긴장됐습니다

오후가 되자 팀장님이 제 자리로 왔습니다.

“지금 괜찮아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잠깐만요.”

팀장님이 제 옆에 섰습니다.

평소에도 회사에서 자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의실에서도 보고, 복도에서도 보고, 탕비실에서도 보고,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마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팀장님이 제 옆에 섰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또렷했습니다.

깔끔하게 접힌 셔츠 소매.

손목시계.

화면을 가리키는 긴 손가락.

가까이에서 낮게 들리는 목소리.

전부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습니다.

팀장님은 화면을 보며 말했습니다.

“여기 수식이 이전 시트랑 연결돼 있네요.”

저는 화면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의 손이 먼저 보였습니다.

마우스를 잡은 손등,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목, 화면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어깨.

왜 그런 것까지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워서 괜히 의자를 조금 뒤로 뺐습니다.

팀장님이 물었습니다.

“불편해요?”

저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요. 그냥… 화면이 잘 안 보여서요.”

거짓말이었습니다.

화면은 잘 보였습니다.

문제는 화면이 아니라 제 마음이었습니다.

팀장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다시 설명했습니다.

“이 부분만 수정하면 될 것 같아요. 생각보다 간단해요.”

저는 작게 대답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가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요.”

그 말에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습니다.

누가 제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괜찮은 척하고 있었는데, 팀장님은 제가 아직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팀장님이 그냥 좋은 상사로만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라서 눈에 들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여사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서 신경 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작아진 순간을 모른 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를 더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 조용한 배려가 자꾸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팀장님을 볼 때마다, 고마움인지 설렘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자꾸 숨기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했습니다

그날 저녁, 팀장님이 고생했다며 몇 사람에게 밥을 먹고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빠지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그냥 집에 가서 씻고 눕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밥이라도 먹고 가요. 빈속이면 더 힘들어요.”

그 말에 저는 결국 따라갔습니다.

식당에서는 다들 발표 이야기와 업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거의 듣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팀장님이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덜 불편했습니다.

그가 제 쪽을 자주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말을 걸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테이블에 있다는 것만으로, 하루 종일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호프집에서 처음으로 업무가 아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밥을 먹고 몇 사람은 먼저 일어났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저도 분위기에 밀려 따라갔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팀장님과 처음으로 업무가 아닌 이야기를 오래 나눈 건.

우리는 마주 앉은 것도 아니고, 나란히 앉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테이블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애매하게 비스듬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오히려 편했습니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말을 꺼내도 어색하지 않고, 침묵이 와도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사실 저는 팀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오래 하는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직원들이 웃으며 말을 걸어도 그는 예의 있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시선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 농담처럼 “팀장님은 여자친구 없으세요?”라고 물어도, 그는 늘 웃으며 말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오늘은 제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들어주는 걸까.

왜 제가 말을 멈추면 바로 다른 주제로 넘기지 않고, 잠깐 기다려주는 걸까.

그 기다림이 이상하게 다정했습니다.

팀장님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맥주잔을 오래 들고 있었지만, 마시는 속도는 느렸습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말할 틈을 조용히 남겨두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용한 대화 속에서 다른 얼굴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발표가 얼마나 긴장됐는지, 자료를 만들면서 어떤 부분이 제일 어려웠는지,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면 좋을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대화가 조금씩 다른 쪽으로 흘렀습니다.

좋아하는 음식, 퇴근 후에 주로 하는 일, 주말에 쉬는 방식.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는지, 조용한 곳을 더 편하게 느끼는지.

놀랍게도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둘 다 약속 없는 주말 오전을 좋아했습니다.

사람 많은 맛집보다 조용한 동네 식당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일이 몰리면 말수가 줄어드는 점도 비슷했습니다.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비슷한 게 많네요.”

저는 괜히 맥주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좀 놀랐어요.”

그 말이 별말 아닌데도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멀게 느껴지던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잘생기고, 여사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그런데도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날은 제 앞에서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업무를 지시하는 팀장님이 아니라, 조용한 주말을 좋아하고, 사람 많은 곳을 피곤해하고, 맥주잔을 천천히 돌리며 제 말을 기다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고마움으로 시작한 감정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저는 발표 실수보다 호프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그의 맥주잔을 더 오래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비슷한 게 많네요”라고 말하던 낮은 목소리를 몇 번이나 다시 생각했습니다.

고마움이라고만 하기에는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팀장님이 왔는지 보게 됐습니다.

메신저 알림이 뜨면 괜히 이름부터 확인하게 됐습니다.

회의실에 들어가면 그가 어디 앉는지 먼저 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고마운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역들 앞에서 제 실수를 조용히 덮어준 사람.

제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끝까지 제 얼굴을 보지 않았던 사람.

자료를 같이 봐주면서도 티 내지 않았던 사람.

그런 사람에게 고마운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마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다가 팀장님의 발소리가 들리면 괜히 컵을 다시 잡았습니다.

복도 끝에서 그가 걸어오면 휴대폰을 보는 척했습니다.

회의 중에 그가 제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날 하루가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이건 그냥 고마움일까.

아니면 내가 팀장님을 좋아하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마음 하나 꺼내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과 마주치는 모든 장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가 의미처럼 보이고, 작은 배려 하나가 신호처럼 보이고, 평범한 메신저도 괜히 오래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마음을 눌렀습니다.

팀장님은 원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누가 곤란해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나에게만 특별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내가 도와줬잖아요”라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필요한 순간에만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게 더 신경 쓰였습니다.

도와줬다는 티를 내지 않는 사람.

내가 민망해할 만한 이야기는 끝까지 꺼내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냥 고마운 상사라고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꾸 나를 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거래처에 보낼 메일 제목에 날짜를 잘못 적었습니다.

보내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지만, 순간 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작게 말했습니다.

“아, 또 왜 이러지.”

그때 옆자리 쪽에서 팀장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내기 전에 봤으면 실수 아니죠.”

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팀장님은 자기 모니터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를 놀리는 표정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표정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말했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좋았습니다.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좀 낫네요.”

그가 그제야 저를 봤습니다.

“진짜잖아요. 아직 안 보냈잖아요.”

별말 아닌데, 그 말이 또 마음에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팀장님은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저를 대단하게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고 억지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제 실수에 너무 오래 갇히지 않게, 옆에서 문을 조금 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무서웠습니다.

좋아지는 마음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그날 저녁 이후로 팀장님의 말투와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화면을 가리키던 긴 손가락도, 호프집에서 제 말을 기다려주던 침묵도, “천천히 해요”라고 보내온 짧은 메시지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이건 단순히 고마운 마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회사에서 마주치는 팀장님이 전보다 더 멀고도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음이 들킬 뻔했습니다

그날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사무실 조명은 절반쯤 꺼져 있었고, 복도 끝에서는 청소기 소리가 작게 들렸습니다.

저는 가방을 챙겨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습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도 늦게 가네요.”

팀장님이었습니다.

저는 괜히 가방끈을 다시 고쳐 잡았습니다.

“그러게요. 오늘은 좀 밀렸어요.”

둘만 서 있는 복도는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숫자는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고, 저는 그 숫자만 보는 척했습니다.

사실은 옆에 선 팀장님이 너무 신경 쓰였습니다.

그가 먼저 말했습니다.

“오늘 자료는 괜찮았어요.”

저는 겨우 웃었습니다.

“덕분에요.”

팀장님은 고개를 살짝 저었습니다.

“아니요. 오늘은 혼자 잘하셨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습니다.

중역들 앞에서 얼어붙었던 제 마음을, 그가 다시 조심스럽게 만져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괜히 엘리베이터 숫자만 바라봤습니다.

팀장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너무 자책하지 마요.”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힘들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제가 제일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아주 조심스럽게 덮어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겨우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말, 자꾸 해주면 믿게 되잖아요.”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습니다.

너무 속마음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팀장님도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그 짧은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둘 다 바로 타지 못했습니다.

제가 먼저 움직이려는 순간, 팀장님이 낮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믿어도 되는데요.”

그 말에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습니다.

별말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상사가 후배 직원을 격려한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그 말이 업무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퇴근 무렵 사무실 복도에서 분홍색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은 여성 직장 동료와 정장 차림의 남성 직장 동료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
퇴근길 복도에서 나란히 걷는 그 짧은 순간, 고마움이라고만 생각했던 마음이 조금씩 설렘으로 바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침묵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나란히 섰습니다.

거울에 비친 팀장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는 앞만 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옆에 선 그 사람의 숨소리까지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와 제 어깨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거리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이 닿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의 짧은 침묵이 자꾸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1층에 가까워질수록 저는 오히려 더 긴장했습니다.

문이 열리면 이 분위기도 끝날 텐데, 이상하게 그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로비 불빛이 보였을 때, 그제야 저는 숨을 쉬었습니다.

팀장님은 먼저 문을 잡아주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팀장님도요.”

별것 아닌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짧은 인사마저 쉽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는 길, 저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꺼냈다 넣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오늘 고마웠다고.

아니, 사실은 팀장님 때문에 하루가 조금 괜찮았다고.

하지만 보내지 못했습니다.

회사 사람에게 마음이 생긴다는 건, 늘 이렇게 한 걸음 앞에서 멈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알았습니다.

고마움이라고 부르던 마음이 이미 다른 이름 쪽으로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그날의 배려를 쉽게 호감이라고 부르지 못한 이유

그날 이후에도 저는 그 마음을 쉽게 호감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팀장님의 배려가 정말 저를 향한 특별한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가볍게 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곤란해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팀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조용히 정리했고, 상대가 민망해질 만한 말은 끝까지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날 제 실수를 덮어준 일도 그냥 팀장으로서 한 행동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좋아한다고 믿고 싶었지만, 회사에서는 마음 하나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괜히 혼자 의미를 붙였다가, 다음 날 회의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팀장님을 자꾸 확인하게 됐습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면 먼저 그가 들어오는지 봤고, 메신저 알림이 뜨면 이름부터 확인했습니다.

복도 끝에서 큰 키의 실루엣이 보이면 괜히 걸음을 늦췄습니다.

탕비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컵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게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을 뿐입니다.

프린터 앞에서 손목이 잠깐 닿았습니다

며칠 뒤, 프린터 앞에서 종이가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출력물이 반쯤 걸린 채 멈췄고, 저는 괜히 혼자 당황했습니다.

“왜 또 이러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뒤에서 팀장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잠깐만요. 그거 억지로 빼면 더 찢어져요.”

그가 제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서자 셔츠에서 아주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습니다.

저는 괜히 한 걸음 물러서려 했습니다.

그 순간 프린터 아래쪽에 떨어진 종이를 밟을 뻔했고, 몸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팀장님이 반사적으로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아주 짧았습니다.

정말 붙잡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의 온도는 너무 또렷했습니다.

“괜찮아요?”

팀장님이 낮게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괜찮아요.”

그는 바로 손을 놓았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더 오래 남았습니다.

붙잡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제가 놀라지 않게 먼저 거리를 돌려주는 사람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프린터 덮개를 열고 걸린 종이를 빼냈습니다.

저는 그 옆에 서 있었지만, 더는 프린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 제 손목을 감쌌던 손의 감각만 이상하게 선명했습니다.

그가 종이를 정리해 제게 건넸습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저는 종이를 받다가 또 한 번 손끝이 스쳤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손을 조금 늦게 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티가 났을까 봐 바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손을 오래 잡은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와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손목의 감각과 스친 손끝이 그날 오후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문제는 팀장님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제 마음이 이미 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마음이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팀장님이 한 일은 아주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제 실수가 더 커지지 않게 말 한마디를 보태줬고, 오후에는 파일을 같이 봐줬고, 제가 또 자책하려 할 때마다 짧게 붙잡아줬습니다.

프린터 앞에서는 넘어질 뻔한 제 손목을 잠깐 잡아줬고,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문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 남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크게 웃게 해준 날보다, 내가 가장 창피했던 순간에 나를 덜 창피하게 만들어준 날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팀장님은 저를 구해준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고마웠습니다.

제 실수를 덮어주면서도, 자기가 덮어줬다는 사실까지 조용히 숨겨준 사람.

제가 민망해할까 봐 끝까지 제 얼굴을 빤히 보지 않던 사람.

제가 말을 고르느라 잠깐 멈추면,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던 사람.

넘어질 뻔한 순간에는 잡아줬지만, 제가 괜찮다고 하자 바로 손을 놓아주던 사람.

그런 사람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마음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마움이라고 하기에는 자꾸 떠올랐고, 호감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팀장님을 조금 기다리게 됐습니다.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메신저 알림 속에서.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제 쪽으로 걸어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은 먼저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말을 걸면 대답은 짧게 했지만, 그 짧은 대화를 집에 가서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주면, 그날 하루가 조금 덜 무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프린터 앞에서 잠깐 닿았던 손목의 감각이 아무 이유 없이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그건 그냥 도와준 거야.

그냥 넘어질 뻔해서 잡아준 거야.

팀장님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알게 됐습니다.

회사에서 마음이 시작될 때는, 꼭 고백 같은 장면이 먼저 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가장 작아진 순간을 모른 척하지 않는 사람.

가까이 오면서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남겨두는 사람.

넘어질 뻔한 순간에는 잡아주지만, 괜찮다고 하면 바로 놓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꾸 마음에 남았습니다.

팀장님은 제 마음을 흔들려고 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마음은 팀장님을 모르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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