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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앙공원? 부산민주공원? 공원이름 왜 이래?…한 지역 두 이름 무슨 사연?

부산 중앙공원과 민주공원 같은 지역 다른 이름 이상해

민주공원이란 독특한 이름 놔두고 흔한 중앙공원 고집해



민주주의와 관련된 공원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참 재밌지 않습니까. 어떤 공원인지 혹시 아세요. 민주주의와 관련된 공원이라면 생각만해도 대단하죠. 민주주의와 민주라는 말은 세계의 여러회사들마다 선호부산민주공원을 아시나요? 그

럼 부산 중앙공원은 아시나요? 그렇다면 부산 대청공원도 아시나요?  민주공원은 뭐고 중앙공원은 뭐고 또 대청공원은 뭔가요. 부산항과 부산의 구도심인 중앙동과 보수동, 대신동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중앙공원이 부산에 있습니다.

이곳은 역사적인 민주공원이 있기에 그만큼 소중한 역사의 한 자락으로 남아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그런데 명칭이 이상합니다. 중앙공원이라고 표기한 곳도 있고 민주공원이라고 표기한 곳도 있습니다. 한 곳을 두고 왜 민주공원과 중앙공원으로 동시에 표기가 되어 있을까요. 어떻게 된 사연일까요. 이를 돌아봤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괌심있게 주어볼 곳은 바로 민주공원과 중앙공원입니다. 또같은 지역을 두고서도 왜 다른 이름을 사용할까요.


부산중앙공원이나 부산민주공원이냐? 부산 중앙공원은 뭐야?
부산의 공원을 살펴보죠. 부산 중앙공원은 대청동과 보수동 일대 그리고 대신동 일대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공원입니다. 현재의 중앙공원은 1970년 9월 대청공원으로 고시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대청공원이 일재의 잔재가 베어 개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때 구봉산과 엄광산 일대를 포함하여 1986년 12월 중앙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부산중앙공원이나 부산민주공원이냐?  민주공원은 뭐야?
이렇게 바뀐 중앙공원에 1999년 10월16일 민주항쟁기념관이 개관하고 이듬해 광복기념관이 문을 열게 됩니다. 말하자면 민주공원은 민주화를 위해 산화해가신 분들을 기리는 역사의 고장입니다.

그런데 중앙공원 안에 민주공원이 있기 때문에 명칭 문제가 불거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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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앙공원이나 부산민주공원이냐? 중앙공원과 민주공원 명칭갈등 왜?
명칭문제가 생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내버스 문제 때문입니다. 부산시가 시내버스 종점을 일부 단체의 요구에 따라 민주공원에서 중앙공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정치적 논란과 함께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이 민주공원으로 명칭을 회복해 달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시민들의 주장은 부산시가 10년동안 사용해왔던 민주공원 명칭을 시민들과 시민단체 전문가의 의견도 제대로 듣지않고 일방적으로 바꾼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산중앙공원이나 부산민주공원이냐? 왜 민주공원이어야 하나?
올해는 민주공원 개관이 되는 11주년이자 부마민주항쟁 31주년, 6월항쟁 23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민주공원이 지닌 의미는 더욱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계기로 시민단체들은 버스노선표지판에 민주공원 명칭 복원, 도로표지판 변경 등의 작업 전면 중단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민주공원엔 한국의 민주화 성지답게 중요한 사료들이 많습니다. 부산이 다른 곳보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보유했으면서도 민주라는 좋은 단어를 두고 중앙공원이라는 다소 엉뚱한 명칭으로 돌아간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부산중앙공원이나 부산민주공원이냐? 민주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인데
민주라는 단어는 너무나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정당들이 민주당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민주라는 말은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말은 놔두고 중앙공원의 중앙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좋은 말과 의미있는 곳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민주공원이라는 말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해 보세요. 얼마나 인상적일까요. 하지만 중앙공원이라고 소개한다면 흔하디 흔한게 중앙공원이기에 그렇게 강한 인상은 남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주공원일까요. 아니면 중앙공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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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독방에선 무슨일이? 민주공원에 독방이?…6월민주항쟁 현장에 가보니

독재타도 외치던 수많은 시민들이 이끈 민주주의 향한 절규

민주주의 외치던 무고한 양심적 시민들 감금했던 아픈 현장




"민주주의가 뭐죠?"
"지금 때가 어느때인데 이념적인 것을 말해요? 잘 몰라요. 관심도 없구요"

최근 대학생들에게 민주주의란 화두를 던져봤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관심밖이라는 것입니다. 청년실업이라는 현실의 벽앞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사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누리는 민주주의가 이땅의 선대들이 피와땀으로 이룩한 것임을 생각할때 후대들도 이를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할것 같았습니다. 6월 민주항쟁 23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땅엔 온통 월드컵 열기가 가득합니다. 스포츠에 파묻혀 6월항쟁은 관심밖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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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알아야할 6월항쟁
오늘은 2010년 6월10일입니다. 6월항쟁 23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도 관심밖입니다. 작게 되도록 작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의미와 재조명 기획기사나 특집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되돌려 23년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1987년 6월29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지난한 6월항쟁이 마침내 조그만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6월 민주항쟁은 당시 부산 서면과 남포동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이끈 민주주의를 향한 절규였습니다. 당시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절규했던 ’6월의 주역'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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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민주항쟁의 23주년날에 독방 체험해보니
6월항쟁을 앞두고 민주공원을 다녀왔습니다. 부산민주공원은 민주주의를 위해 피땀을 흘린 고귀한 분들과 여러가지 사료가 가득찬 민주주의의 총산입니다.

이곳에 독방이 있습니다. 독방은 군부독재정권이 민주화 인사들을 구금하고 그 속에서 생활하게 했던 그야말로 인권탄압의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각종 고문과 말로표현할 수 없는 인권탄압이 이뤄졌던 곳입니다.  




☞ 독방 들어가봤더니
필자는 6월항쟁 당시 대학을 다녔습니다. 필자 또래의 사람들은 아직도 어제인듯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6월항쟁. 그 중에서 독방은 당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신 고귀한 분들의 피와땀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독방은 민주공원 전시관 한편에 마련돼 있습니다. 독방문은 '쾅'하고 닫힙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커든지 귀가 다 아플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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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뜩한 풍경의 독방
독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쾅' 하고 닫고 밖에서 걸어잠그는데 깜짝 놀라 괴성을 질렀습니다. 일순간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 붙들려 독방에 감금된 여러 선후배들이 생각나 섬뜩했습니다.

1~2평 남짓한 독방은 창문하나 없이 벽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즈러진 불빛만이 방안을 비춰줍니다.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리현상까지 해결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해 보입니다. 답답하다 못해 미처버릴 것같은 심정입니다.

☞ 정신만을 곧추세우고 이땅의 민주화를 되뇌이던 그분들은…. 

좁디곱은 독방. 어둠만이 감시하듯 내려쬐는 방. 단 일순간도 들어가 앉아있기 싫은 그 방을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외쳤던 민주화인사들은 장기간 감금돼 있었습니다.

오는날 체험하는 사람들조차도 숨이 딱막힐 지경인데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피와땀을 흘렸던 선후배들의 고통과 굴종의 세월은 어땠을 지 차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한 장기수의 글에서 상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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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어두운 방안에서 숨이 칵칵 막혀오는 듯했습니다.
저 속에서 민주화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혼자서 독방에 있으면 말 한마디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수가 많았다. 그럴때마다 공포를 느꼈다.
고독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라 언어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공포 말이다.
사람은 사회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사람이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인간동물'은 될 수 있어도 사회인은 될 수 없다.
수도자로 살지 않는 이상 사람이 세상과 격리되어 혼자 생활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한 비전향 장기수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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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민주항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이땅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세요? 오늘날 민주주의는 이땅의 선후배들이 흘린 피땀으로 마음껏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어떠세요. 아직도 사각지대에선 인권탄압이 공공연이 일어나고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이 명예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채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현재 실감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탄압을 겪게되면 곧장 실감하게 됩니다. 6월항쟁 그 목청껏 외쳤던 그날의 함성으로, 그날의 치열한 몸짓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게 진정한 의미의 6월민주항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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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맞은 오늘 우리는 어디로?…6월항쟁 정신 어디로? 6월항쟁이 뭐길래?

1987년 6월29일 이땅에 횟불을 올린 6월항쟁 정신은 살아있어

6월항쟁의 민주주의 향한 열정과 고귀한 정신 길이길이 본받아야



6월 항쟁이 어느덧 22주년을 맞았습니다. 6월항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6월 항쟁을 직접 겪지않은 세대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이 점점 스러져 갑니다.


하지만, 올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새삼 그 당시의 절규가 남다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6월 항쟁은 결코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선봉에서 목청껏 민주화를 외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 아마 오늘도 그날을 생각하며 하늘에서 이땅을 내려다 보고 계시겠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다시 맞은 6월항쟁을 돌아봤습니다.



1. 노무현 전 대통령과 6월항쟁
1987년 6월29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기나긴 6월항쟁이 조그만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6월 항쟁 당시 부산은 서면과 남포동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수십만 명의 시민들을 주도적으로 이끈  ’6월 주역'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당시 ‘부산항쟁'을 주도한 단체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였습니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중의 한사람은 노무현 당시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입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는 시위 행렬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범내골로터리 4층 건물 맨 위층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간판도 없는 열평 남짓한 이 사무실은 당시 건물을 뒤덮는 현수막을 내걸고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 건물은 두 건물 사이를 증축한 독특한 구조 때문에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사무실 옥상을 통해서 다른 건물 입구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무실을 빼라는 기관들의 압력에도 건물주인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있는 뜻깊은 곳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를 합격합니다.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임용뒤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합니다. 1981년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약합니다. 이후 86년부터는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6월 항쟁의 주역이 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재야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다 6월항쟁을 통해 일약 민주화투쟁의 핵심인물로 부상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노 전대통령은 이후 88년 4.26총선에서 5공화국의 대표적 인사를 물리치고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 청문회 등을 통해 대중정치인으로 데뷔합니다.




2, 6월 항쟁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국민들이 들불처럼 일어섰던 6월 민주항쟁이 올해로 22주년을 맞았습니다.


6.10항쟁은 아이들부터 60대 어르신들까지, 직장인에서 대학생 부두노동자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직업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 십만명의 시민들이 87년 6월10일 이후 6월29일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때까지 목이 터져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해방이후 최대의 민주항쟁이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1월 14일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던 부산출신의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대규모 집회로 나아갔습니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가 주최한 2월 7일 추도식 집회와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은 당국이 경찰력으로 막았으나 오히려 부근에 있었던 시민들의 호응을  받을 정도였고 거리에서 경찰에 대한 비난이나 항의 등의 형태로 시민들이 점차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정세를 오판한 군사정권은 4월 13일 개헌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헌법으로 대통령선거를 하겠다는 ‘4 · 13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그러자 대한변협 개신교 민통련 등이 호헌반대선언을 하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신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각 대학교수, 문학인, 전 · 현직 의원, 변호사, 교사, 대학원생,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영화인, 연극인, 미술인 대중연예인 등 각계에서 4 · 13호헌조치 반대 성명서가 나오고 기자들은 자유언론쟁취운동을 벌였습니다.


'4·13호헌선언’은 마른 장작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고, 이한열열사의 최루탄 피격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3. 간단하게 정리해본 6월항쟁 
1987년 1월14일 박종철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합니다. 3월3일엔 ‘고 박종철열사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고 박종철열사 49제’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 을 진행합니다.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을 발표합니다. 5월18일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을 폭로합니다. 5월27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하고 4·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합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열사가 교내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피격당합니다. 6월10일 국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개최, 6월 민주 대항쟁 시작, 명동성당 농성 투쟁 시작합니다.


6월15일 전국 45개 대학생 68,000여명 격렬한 시위를 하게 됩니다. 6월18일 국본,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결의대회’가 개최되고 전국적으로 150만명이 참가합니다.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전국 33개 지역에서 18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6월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시국 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합니다.


4. 부산의 6월 항쟁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독재정권이 자행한 민주화세력에 대한 살인행위로 규정한 부산시민들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산 재야인사들은 박종철열사의 추도집회를 준비하며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신호탄을 올립니다.


2월7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개최된 추도회를 계기로 군사정권은 재야인사에 대한 사전 가택연금, 연행, 구속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3월3일 부산의 대각사 앞에서 ‘박종철열사 추모 3.3 부산대행진’이 열렸고 사하구의 사리암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 박종철열사 49재가 열립니다.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호헌’의 부당함과 시국수습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이 연이어 발표됩니다.

5월17일엔 노동자인 황보영국열사가 옛 부산상고 앞 복개도로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광주학살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합니다. 


5월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 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돼 부산지역 6월항쟁을 이끌 지도부가 꾸려집니다.


6월10일 대각사 앞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고 박종철열사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부산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게 됐고 여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6월 항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6월16일 심야시위 도중 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대청동 가톨릭센터로 피신하면서 가톨릭센터 농성을 전개하게 됩니다.


6월18일, 좌천동 입체교차로에서 시위하던 이태춘열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은 30여 만명의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웁니다.


5. 오늘날 6월 항쟁의 의미는
6월 항쟁은 국민들의 항쟁으로 급기야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냈고, 문민정부가 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으며, 이후 민주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6월 항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참다운 민주사회, 강제와 억압이 없고 억울한 희생자가 없는 사회가 오늘날 이땅에 이뤄졌을까요.

6월 항쟁은 올해로 벌써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과연 ‘참다운 민주사회’일까요. 오늘날 아직도 해야할 과제가 많은 6월 항쟁은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6월 항쟁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당시의 절규를 모르고 자란다는 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또 그들에게 6월 항쟁의 정신을 오늘날 구현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도 있습니다.

비록 6월 항쟁은 벌써 22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은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후세대들에게 그 정신을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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