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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짱과 민주주의, 8일간의 이야기 이곳서?…민주공원에 노무현 전대통령 흔적이?

노짱과 노무현 대통령님, 노무현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 어떤 단어가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까. 노짱의 영결식이 5월29일 치러졌습니다. 그 뜨겁던 추모열기는 채 3주도 안돼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노짱에 대해 거친 언변을 마구 토해냅니다. 정가에서조차도 노짱의 거룩한 정신을 당리당략으로 혹은 정쟁으로 치고 받습니다. 그러는 사이 노짱의 추모열기도, 그 분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숙제도 서서이 익혀져 갑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역사가 변해도 그 분이 남긴 흔적과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비록 일부 사람들과 일부 언론의 엉뚱한 재평가 속에서도 그분은 영원히 우리곁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발자취가 그리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1. 노무현과 민주주의-그 8일간의 이야기
부산민주항쟁을 기념해 만든 기념관이 있습니다. 바로 부산민주공원입니다. 이곳은 그래서 민주주의 정신이 흘러 넘쳐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을 기리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는 7월5일까지 계속될 이 ‘노무현과 민주주의-그 8일간의 이야기(Roh, Moohyun and democracy - that the story of eight days) ’ 기획전은 부산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열립니다.


작가는 2009년 5월23일 노짱께서 봉화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서거하신 그날부터 7일간의 국민장과 그 다음날까지를 기점으로 8일간 국민들에 의한 노짱과 민주주의에 대한 표현을 담았습니다.







2. 작가의 눈에 비친 노무현과 민주주의
작가는 “자료를 준비하면서, 대다수의 국민들과 누리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본 그들은 이 동일시되는 2가지의 죽음에 대한 애통과 분노 그리고,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내보이기도 합니다. 추모와 혼재된 이 짧은 기간에 그들에겐 곧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어 졌고, 노무현이란 한 인간사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담론을 각각 표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국민적인 참여 예술품들은 창작자들이 짧은 순간 솔직히 드러낸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의 표현들이므로 더욱 생생하게 관람자들에게 전달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3. 블로그가 작품 중심으로!
이번 기획전의 전시물들은 노짱의 서거 당일인 5월 23일부터 국민장 다음날인 5월 30일까지 블로그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란 단어 검색을 하여 일자 별로 채집한 것입니다.

작가는 블로그에 게재된 작품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자발적인 감정의 표출일 뿐 더러 대중의 밑바닥에서 분출하는 감정들의 모음들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블로그도 있고 그렇지 못한 블로그도 있습니다. 티스토리 블로그도 있고 다음과 네이버 사이월드 블로그들이 골고루 망라돼 있습니다.



4. 8일간 종이신문 1면도 작품으로

8일 동안의 대표적인 국내 종이신문의 1면을 모아 작품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실제 쓰이기도 했던 시각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사진들과 8일간 우리 국민들이 추모하면서 남겼던 글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추모열기가 오롯한 곳입니다.




5. 노짱의 흔적과 작가의 열정이 서려 있는 곳
노짱의 서거로 갑작스럽게 닥친 공동체의 슬픔 앞에 우리는 ‘노무현’과 ‘민주주의’란 화두로 온 국민이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오늘날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고. 그 분이 남긴 과제를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고. 어떠세요. ‘노무현’이란 단어가 지금 현재는 어떤 느낌으로 와 닿습니까. 한때의 슬픔인가요, 아니면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조타수인가요?


오늘 하루는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해 보시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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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맞은 오늘 우리는 어디로?…6월항쟁 정신 어디로? 6월항쟁이 뭐길래?

1987년 6월29일 이땅에 횟불을 올린 6월항쟁 정신은 살아있어

6월항쟁의 민주주의 향한 열정과 고귀한 정신 길이길이 본받아야



6월 항쟁이 어느덧 22주년을 맞았습니다. 6월항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6월 항쟁을 직접 겪지않은 세대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이 점점 스러져 갑니다.


하지만, 올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새삼 그 당시의 절규가 남다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6월 항쟁은 결코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선봉에서 목청껏 민주화를 외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 아마 오늘도 그날을 생각하며 하늘에서 이땅을 내려다 보고 계시겠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다시 맞은 6월항쟁을 돌아봤습니다.



1. 노무현 전 대통령과 6월항쟁
1987년 6월29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기나긴 6월항쟁이 조그만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6월 항쟁 당시 부산은 서면과 남포동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수십만 명의 시민들을 주도적으로 이끈  ’6월 주역'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당시 ‘부산항쟁'을 주도한 단체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였습니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중의 한사람은 노무현 당시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입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는 시위 행렬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범내골로터리 4층 건물 맨 위층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간판도 없는 열평 남짓한 이 사무실은 당시 건물을 뒤덮는 현수막을 내걸고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 건물은 두 건물 사이를 증축한 독특한 구조 때문에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사무실 옥상을 통해서 다른 건물 입구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무실을 빼라는 기관들의 압력에도 건물주인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있는 뜻깊은 곳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를 합격합니다.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임용뒤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합니다. 1981년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약합니다. 이후 86년부터는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6월 항쟁의 주역이 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재야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다 6월항쟁을 통해 일약 민주화투쟁의 핵심인물로 부상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노 전대통령은 이후 88년 4.26총선에서 5공화국의 대표적 인사를 물리치고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 청문회 등을 통해 대중정치인으로 데뷔합니다.




2, 6월 항쟁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국민들이 들불처럼 일어섰던 6월 민주항쟁이 올해로 22주년을 맞았습니다.


6.10항쟁은 아이들부터 60대 어르신들까지, 직장인에서 대학생 부두노동자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직업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 십만명의 시민들이 87년 6월10일 이후 6월29일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때까지 목이 터져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해방이후 최대의 민주항쟁이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1월 14일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던 부산출신의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대규모 집회로 나아갔습니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가 주최한 2월 7일 추도식 집회와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은 당국이 경찰력으로 막았으나 오히려 부근에 있었던 시민들의 호응을  받을 정도였고 거리에서 경찰에 대한 비난이나 항의 등의 형태로 시민들이 점차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정세를 오판한 군사정권은 4월 13일 개헌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헌법으로 대통령선거를 하겠다는 ‘4 · 13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그러자 대한변협 개신교 민통련 등이 호헌반대선언을 하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신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각 대학교수, 문학인, 전 · 현직 의원, 변호사, 교사, 대학원생,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영화인, 연극인, 미술인 대중연예인 등 각계에서 4 · 13호헌조치 반대 성명서가 나오고 기자들은 자유언론쟁취운동을 벌였습니다.


'4·13호헌선언’은 마른 장작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고, 이한열열사의 최루탄 피격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3. 간단하게 정리해본 6월항쟁 
1987년 1월14일 박종철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합니다. 3월3일엔 ‘고 박종철열사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고 박종철열사 49제’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 을 진행합니다.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을 발표합니다. 5월18일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을 폭로합니다. 5월27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하고 4·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합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열사가 교내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피격당합니다. 6월10일 국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개최, 6월 민주 대항쟁 시작, 명동성당 농성 투쟁 시작합니다.


6월15일 전국 45개 대학생 68,000여명 격렬한 시위를 하게 됩니다. 6월18일 국본,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결의대회’가 개최되고 전국적으로 150만명이 참가합니다.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전국 33개 지역에서 18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6월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시국 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합니다.


4. 부산의 6월 항쟁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독재정권이 자행한 민주화세력에 대한 살인행위로 규정한 부산시민들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산 재야인사들은 박종철열사의 추도집회를 준비하며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신호탄을 올립니다.


2월7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개최된 추도회를 계기로 군사정권은 재야인사에 대한 사전 가택연금, 연행, 구속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3월3일 부산의 대각사 앞에서 ‘박종철열사 추모 3.3 부산대행진’이 열렸고 사하구의 사리암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 박종철열사 49재가 열립니다.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호헌’의 부당함과 시국수습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이 연이어 발표됩니다.

5월17일엔 노동자인 황보영국열사가 옛 부산상고 앞 복개도로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광주학살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합니다. 


5월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 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돼 부산지역 6월항쟁을 이끌 지도부가 꾸려집니다.


6월10일 대각사 앞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고 박종철열사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부산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게 됐고 여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6월 항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6월16일 심야시위 도중 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대청동 가톨릭센터로 피신하면서 가톨릭센터 농성을 전개하게 됩니다.


6월18일, 좌천동 입체교차로에서 시위하던 이태춘열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은 30여 만명의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웁니다.


5. 오늘날 6월 항쟁의 의미는
6월 항쟁은 국민들의 항쟁으로 급기야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냈고, 문민정부가 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으며, 이후 민주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6월 항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참다운 민주사회, 강제와 억압이 없고 억울한 희생자가 없는 사회가 오늘날 이땅에 이뤄졌을까요.

6월 항쟁은 올해로 벌써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과연 ‘참다운 민주사회’일까요. 오늘날 아직도 해야할 과제가 많은 6월 항쟁은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6월 항쟁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당시의 절규를 모르고 자란다는 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또 그들에게 6월 항쟁의 정신을 오늘날 구현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도 있습니다.

비록 6월 항쟁은 벌써 22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과 그날의 함성은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후세대들에게 그 정신을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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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짱, 이곳이 당신의 또다른 고향 아시죠…이곳 꼭 보세야죠

노짱에겐 고향이 두 곳 있습니다. 한 곳은 태어나 자란 김해 봉하마을입니다. 또다른 고향은 정치적 고향입니다. 그곳은 다름아닌 부산 동구지역입니다.




이제 대통령님과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옵니다. 대통령님에게 고향마을 못지않게 정치적 고향도 꼭 보시고 가시라고 부산 동구지역을 다녀봤습니다.


노짱, 잘 보세요. 이곳 부산 동구가 한명의 변호사 노무현을 정치인으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키워낸 곳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정치를 시작하셨습니다. 골목골목을 성능 안좋은 메가폰을 메고 누비기도 하고, 때로는 마이크 없이 목소리로 외치다 목이 쉬기도 했던 그때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부산 동구 일대. 부산역과 부산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1. 노짱을 제13대 국회 초선의원으로 키워낸 곳 부산 동구

1988년 4월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1971년 제8대 국회이래 17년만의 소선거구제에 의한 선거였습니다. 부산 동구에서도 1명만을 뽑았습니다.


노짱은 이곳에서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이 되었습니다. 중선거구제 시절엔 중구와 동구 영도구가 한 선거구였습니다. 이 3개의 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이 배출되었습니다. 박찬종, 김정길 전 의원 등도 모두 이곳을 통해 배출된 국회의원입니다.
 
부산 동구지역은 대대로 야당성향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여당 후보가 별로 선전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전국구를 포함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을 획득했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집권당이 과반수에 미달하는 이른바 여소야대국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짱은 초선의원 금뱃지를 처음으로 다셨습니다.


노짱은 당선사례를 하시려고 트럭을 타시고 손을 흔들며 달동네를 돌아다니셨습니다. 동구 곳곳엔 노짱의 감사 플래카드가 내걸렸습니다.

하지만 노짱은 1992년 3월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애석하게도 낙선하셨습니다. 그래도 노짱은 트럭을 타시고 동구지역을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성원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부산역 대합실. 이곳을 통해 노짱을 서울로 올라가곤 했다.

부산역 광장. 이곳에서 노짱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셨다.

초량동 산복도로. 산복도로는 높은 곳에 도로가 뚫려 있다.

초량동 일대의 올망졸망하게 붙은 집들.


2. 노짱이 선거운동 했던 부산역과 초량동 일대

초량동 일대는 부산역과 부산항이 인접해 있습니다. 부산의 많은 곳이 바다를 끼고 있지만 초량동 일대는 부산항이 손에 잡힐듯 한 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노짱은 이곳에서 1988년 4월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1992년 3월24일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1995년 6월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선거때마다 이곳 부산역에서 정견발표를 하셨고 선거운동을 하셨습니다.


부산역에서 시작, 차이나타운 거리(일명 텍사스촌), 초량동 주택가, 초량시장, 초량동 산복도로를 누비면서 선거운동을 하셨습니다. 동일국민(초등)학교에서 열린 후보자 정견발표회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노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정동 산복도로와 수정동 일대.

수정동과 좌천동 일대 전경.

동구 수정동일대. 부산항과 저멀리 영도가 보인다.

수정동 산복도로와 수정산.


3. 노짱이 누비던 수정동과 좌천동 일대

수정동과 좌천동 일대는 노짱이 초선이 되기 위해, 또 재선의원이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시절 달동네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집을 짓고 살아 일명 하꼬방집이 참 많았습니다. 그곳을 일일이 누비시면서 선거운동을 하셨습니다.


선거운동을 하시다가 연탄을 나르는 주민을 보면 돕기도 하셨습니다. 요즘이야 소방도로도 개설되고 차로 움직이면 금방이지만 그 좁디좁은 곳을, 높은 동네를 선거운동 하시면서 돌고돌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렇게 선거운동을 하셨습니다. 수성국민(초등)학교에서 열린 후보자 정견발표회엔 노짱의 인기는 단연 높았습니다.


범일동 일대. 저 멀리 안창마을도 보인다.

범일동 일대. 부산진시장과 좌성대가 보인다.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 저 멀리 부산항이 들어온다.


4. 노짱이 지지를 호소하던 범일동일대

범일동 일대도 산복도로들 낀 동네라 선거운동 하기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안창마을까지 다녀가려면 다리가 후들거릴만큼 피곤합니다. 좁디 좁은 골목길을 걸어서 걸어서 일일이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지지를 호소하셨습니다. 

좁은 골목길이 많은 지역이라 범일국민(초등)학교에서 열리는 후보자 정견발표회가 참 중요했습니다.
당시 노짱은 특유의 날카로움과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5. 오늘의 부산 동구

노짱 보이세요. 부산의 동구는 초량1동, 초량2동, 초량3동, 초량6동, 수정1동~수정5동, 좌천1동과 좌천4동, 범일1동, 범일2동, 범일4동, 범일5동으로 모두 14개동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당시와 비교해서 동이 많이 줄었죠. 인구가 줄어 통폐합되어 그렇습니다.


골목골목 누비던 당시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어떠세요.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나요. 아니면 많이 변했나요.


6. 노짱을 기억하는 부산 동구 주민들

세월이 흘러 부산 동구지역도 많은 사람이 이사를 가고 왔습니다. 필자 역시 16년간 살아온 동구를 떠나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노짱 이야기를 꺼내자 주민들은 금방 기억해냅니다. 선거때마다 강한 인상을 남긴 특유의 제스처도 지어 보입니다. 식당을 운영하시던 분들은 소탈하게 먹성좋은 이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노짱을 배출한 정치적 고향 부산 동구 주민들은 노짱의 서거소식이 더 슬프게 와닿습니다.


노짱 보셨나요. 기억나세요. 이렇게 살가운 국민들을 뒤로 하시고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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